디지털시대의 일기(日記) 쓰기
  • 모용복기자
디지털시대의 일기(日記) 쓰기
  • 모용복기자
  • 승인 2019.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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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도민일보 = 모용복기자] 긴긴 방학이 끝나갈 때 즈음 갑자기 바빠진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반드시 해내야 할 일이 두 가지 있었으니 하나는 방학숙제요 다른 하나는 일기(日記) 쓰기다. 방학숙제는 형과 누나의 도움을 받으면 그리 어렵지 않게 끝낼 수 있지만 일기는 다른 문제다. 아무리 초등학생이라고 하지만 조금은 비밀스런 일들과 솔직한 감정을 적는 까닭에 남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개학을 코앞에 두고 두 달 가까운 양의 일기를 하루 이틀 만에 해치워야 하는 일은 여간 곤욕이 아니었다. 이렇게 고단한 일을 선생님은 왜 시키는지 어린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유년시절의 기억 때문인지 어른이 돼서도 나는 일기를 써 본 적이 거의 없다. 아니 시도는 해보았다. 해가 바뀌면 두꺼운 다이어리를 사서 일기를 써보리라 마음을 먹고 시작해보지만 끝내 며칠을 가지 못한다. 앞쪽 몇 장을 빼고는 새하얀 공백이 더 이상 채워지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어쩌다 방송에서 수 십 년 동안 일기를 쓴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그가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냥 살아가기에도 빠듯한 세상에 어떻게 매일 일어난 일을 일일이 기록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분명 신(神)이다. 최소한 내게는.
몇 년 전 한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에서 ‘양아록(養兒錄)’에 대해 소개한 적이 있다. 경북도가 해체 위기에 놓인 가족 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해 조손관계 회복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정한 ‘할매할배의 날’의 배경이 되기도 한 이 저서는 조선 중기 문신(文臣)인 이문건(李文楗)이 16년간 손자를 양육한 경험을 일기형식으로 적은 기록물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육아일기이자 조선시대 사대부가 쓴 유일한 육아일기이다.
조선조 사대부 집안의 선비가 아이를 돌보면서 육아일기를 쓰는 일이 가능했을까? 오늘날 우리가 선비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으로 바라보면 기필코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도 수 십 명의 정승판서와 고위 관리를 배출한 뼈대 있는 명문가 집안에서 말이다. 하지만 양아록은 우리가 조선의 선비에 대해 얼마나 무지(無知)하고 잘못된 편견을 갖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이는 아마도 개념 없는 TV 드라마나 영화를 분별없이 받아들인 탓이요, 더 거슬러 올라가서는 일제 식민주의 교육으로 인한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다.

양아록에는 이문건이 손자 수봉이 16살이 될 때까지 성장과정과 훈육 등이 잘 묘사돼 있다. 병치레 등 사소한 것에서부터 손자의 안위를 염려하는 할아버지의 절절한 마음까지 육아과정의 구체적 상황과 체험, 감정 등에 대한 진솔하게 기록해놓았는데, 그 세세(細細)한 표현은 지금의 시각으로 봐도 탄성이 절로 나온다. 양아록은 조선시대와 그 시대를 산 선비들에 대해 다시 생각게 하는 소중한 기록물이자 우리 조상들의 위대함을 새삼 느끼게 하는 살아있는 자료가 아닐 수 없다. 450여 년 전 한 선비가 쓴 육아일기 덕에 우리는 굴절된 500년 조선의 역사를 고쳐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면 디지털시대인 오늘날은 어떠한가. 우리는 편지 대신에 문자 메시지나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한 메신저로 서로 대화하며, 두꺼운 노트를 펼치는 대신에 초슬림 노트북을 펼쳐 필요한 정보를 얻고 기록을 한다. 스마트폰으로 메모를 하고 하지만 노트북으로 일기를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면 과연 일기장은 이제 정말 쓸모없게 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세상이 디지털화 될수록 일기쓰기와 메모의 습관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최근 일련의 사건이 잘 보여주고 있다.
고은 시인이 본인을 성추행범으로 폭로한 최영미 시인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법원이 최 시인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이 성추행 폭로가 허위가 아니라고 본 배경에는 25년 전 일기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성추행을 뒷받침할 물증이 없어 재판은 한 때 최 시인에게 불리하게 흘러갔다. 하지만 당시 정황이 적힌 일기장이 나오면서 재판은 일시에 반전을 맞았다. 최 시인이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써왔다는 일기가 그를 위기에서 구해낸 것이다.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 심석희 선수를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조재범 전 코치가 검찰로 송치된 데에도 메모가 결정타였다. 심 선수가 남긴 일기 형식의 100쪽 분량 메모에는 성폭행 피해 당시의 장소와 일시, 심경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확실한 물증이 없는 상황에서 조 씨가 사실무근이라며 혐의를 전면부인하고 있어 자칫 유야무야(有耶無耶) 될 뻔한 사건이 메모 덕에 상황이 완전히 역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일기는 이와 같이 악인(惡人)을 잡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쓰는 사람을 선인(善人)으로 이끌어 주기도 한다. 일기를 쓰는 사람 치고 대개 악한(惡漢)이 없다. 굳이 난중일기, 일성록과 같은 기록을 남긴 역사적 위인들이 아니더라도 일기를 쓰는 아름다운 손에 티끌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그러면 지난해 사망보험금을 노리고 신혼여행에서 니코틴 원액을 주입해 아내를 살해한 20대 파렴치한이 일기 때문에 경찰에 덜미를 잡히게 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말하기 좋아서 일기지 필경 그것은 ‘사이코패스’의 살인계획서라고 봐야 맞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뉘우침과 양심(良心)이 결여된 것은 진정한 의미의 일기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일기를 쓰는 행위는 자기성찰과 반성의 과정이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해준다. 어쩌면 요즘과 같은 디지털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이 일기 쓰기가 아닌가 싶다. 비싼 사교육비를 써가며 우리 아이들을 학원으로 내몰 것이 아니라 일기 하나라도 제대로 쓰는 아이로 키운다면 다른 건 몰라도 인성(人性)이 반듯한 사람으로 자랄 건 분명하다. 지금 당장 스마트폰을 내던지고 문구점으로 달려가 노트를 사서 아이와 함께 일기쓰기를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 모용복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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