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상의 정치학
2023-11-02 뉴스1
티베르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로마 병사들이 유일한 퇴로인 나무다리로 몰려들었다. 갑자기 애꾸눈 호라티우스라는 병사가 그들의 앞을 막았다.
“이대로 도망쳐서는 안 된다. 다리를 끊어야 한다. 그동안 내가 적을 막겠다.”
그의 용기에 감동한 귀족 출신 병사 2명이 그에게 합류했다. 세 병사는 짧은 시간이지만 다리를 파괴할 동안 적을 저지했다. 호라티우스는 두 명의 동료를 먼저 보내고 끝까지 싸우다가 강으로 뛰어들었는데 기적적으로 로마 진영으로 생환한다.
로마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민회가 열리는 장소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현재 포로 로마노에 있는 쿠리아(원로원 건물) 근처이다.
로마인들은 정치는 선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은 민족이었다. 동상의 정치적, 선전적 효용을 너무나 잘 알고 잘 이용했다.(이 글에서 말하는 동상은 대리석상도 포함한다) 호라티우스 같은 전쟁영웅뿐 아니라 각 분야에서 훌륭한 일을 한 사람, 큰 기부를 한 사람, 심지어 검투 경기의 스타까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사회를 위해, 국가를 위해 나도 저런 일을 해야 하겠다는 감동을 주는 스토리를 가지는 사람이라면 동상 건립을 아끼지 않았다. 기록과 시로 찬미하는 일도 아끼지 않았지만, 문맹률이 엄청났던 시절, 로마인들은 시청각 교육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황제들도 이 대열에 빠지지 않았다. 황제들의 조각상은 그 자체가 정치적이고, 살아 있는 신으로 추앙되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행동과 업적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동상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카이사르, 건축 황제 하이드리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트리아누스, 콘스탄티누스 황제 같이 특별한 업적을 세운 황제들은 특별한 동상과 기념비를 제작했다.
콜로세움, 신전, 특별한 건축물, 기념비적 장소는 물론이고, 도시마다 있는 광장, 광장 입구의 출입문, 번화가와 관청가는 황제부터 수많은 사람의 동상으로 빼곡히 채워졌다. 오늘날 우리가 방문하는 로마의 유적지는 아무리 훌륭하게 보존된 지역이라고 해도 이런 동상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에는 대단한 장관이었다.
부자들은 공공시설 건립이나 빈민구제에 큰 기부를 하고 시 정부에 자신의 동상을 세워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기부를 하면 조선시대에 공명첩처럼 적당한 관직을 얻기도 했지만, 진짜로 도움이 되는 건 도시의 시장이나 의원으로 당선되는 것이다. 선거운동에 이보다 훌륭한 것이 없었다. 세상을 멀리 보는 사람들은 자신이 이루지 못하면 아들 대에라도 성공하기를 바라면서 아들의 이름으로 함께 기부를 하고, 공적판이나 동상에 함께 새겨 넣었다.
시의원과 기부자는 기부금액과 동상 건립 장소를 두고 협상을 벌였다. 지방도시라고 할 경우 제일 좋은 장소는 포룸의 황제 동상 옆이었다. 당연히 가격이 비싸고 여간해서는 이 자리를 내 주지 않았다.
황제와 정치인, 부자들이 동상을 세우는 데 적극적이었지만, 평범한 농부였던 호라티우스처럼 공적이 탁월한 사람이라면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해방노예도 동상을 세울 수 있었다. 해방노예는 자신은 출마할 수 없지만 아들부터는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 이런 사람들이야 말로 아들 이름으로 기부를 해야 했다.
동상 설립이 거부당해도 방법은 있었다. 로마인들은 가족묘에 흉상과 동상을 세우는 풍습이 있었다. 로마의 공동묘지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성문 밖 주요 도로변에 자리 잡곤 했는데, 해방노예가 부자라면 자신들의 가족묘에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건물을 세우고 이름난 조각가에게 부탁해서 사람들이 눈길을 끌 만한 인상 깊은 동상을 세울 수 있었다.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심지어 설치 장소와 조건을 두고 흥정하는 장면을 상상하면 존경심이 싹 가시고, 혐오스럽기까지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기부와 희생은 순수해야만 가치 있는 행동일까? 세상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아무런 대가나 공명심도 바라지 않고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성인의 경지’, ‘신의 경지’이다. 더 존경받고 특별한 추앙을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이런 부분도 생각해야 한다. 보편적 소양, 보편적 교육, 교화의 목적은 인간을 신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유용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만든다는 말도 불편하다. 인간을 만든다는 건 출생이란 한 번으로 족하다. 교육의 목적은 사람이 유용한 사회인으로 행동하게 하는 것이다.
로마의 동상 문화는 인간 내면의 양심이 아니라 행동을 기린다. 해당 인물의 총체적 ‘덕’이 아니라 ‘공’을 포상하고 고양하는 것이다.
폼페이에서 발굴된 마르쿠스 홀코니우스 루푸스라는 사람의 대리석상이 있다. 그는 지역 유지였고, 시의 유력자였다. 폼페이 대극장의 증축에 거액을 기부했다. 아마도 그런 대가로 이 석상을 세웠을 것이다. 그런데 루푸스 상은 조작이다. 그는 군에 복무한 적이 없는데, 조상은 갑옷을 입은 장군복장을 하고 있다. 머리는 대놓고 다른 사람의 머리를 가져다 붙였다. 처음에는 온전한 상이었는데, 누가 머리를 부쉈거나 파손되는 바람에 가져다 붙인 것일 수도 있다. 연구자들은 카리큘라 황제의 두상이라고 추정한다.
황제의 머리를 떼어다가 붙인 것도 황당하지만 ? 실제 멀쩡한 조각에서 뗀 건 아니고 파손된 폐품 더미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 이런 조각상을 멀쩡하게 용인하는 시의회와 시민들의 마음도 놀랍다. 물론 머리가 파손된 것이 누군가가 이 집안에 사적인 원한이 있었거나 부자들에 대한 증오나 사기적인 조각상에 대한 반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어쩌면 그래서 재범을 방지한다는 의미에서 황제의 얼굴을 가져다 붙였는지도 모르겠다.
사연은 모르겠지만 어찌됬든 이 이중으로 조작된 루푸스상은 매일 같이 시민들을 만나며, 화산 폭발로 폼페이가 사라지던 날까지 생존해 있었다. 근본주의자들은 둔감한 도덕성이라고 부르겠지만, 폼페이 시민들이 루프스에게 이런 관용을 베푼 이유는 무엇일까? 이 동상이 루푸스라는 사람의 총체적 인격이 아니라 그가 돈으로 이룬 공을 기리고, 그 기부에 대한 보상이기 때문이다.
육사에서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한다는 사건으로 사회가 시끄럽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다. 미국 남북전쟁 때 남부의 수도였던 리치먼드에는 남군의 영웅이었던 로버트 리 장군의 동상이 있었다. 높이만 4m에 달하는 이 동상은 프랑스 조각가에게 의뢰해서 만든 작품으로도 가치 있는 동상이었다.
2021년에 이 동상이 철거되었다. 리가 인종차별을 주장한 남부연맹의 사령관이었고, 이 동상이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성소가 되어 추앙받고 있다는 이유였다. 철거를 금지해 달라는 소송과 탄원이 제기되었지만, 버지니아 법원이 탄원을 기각했다. 철거한 동상도 처음에는 아예 분쇄해 버리기로 했었는데, 창고에 보관하기로 했다고 한다.
남부인들이 리의 동상을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인종차별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무너진 남부인들의 자존심을 달래기 위해서? 아니면 군인으로서 리의 능력과 분투를 존경해서? 지휘관, 전략가로서 로버트 리는 남북군을 불문하고 공인하는 남북전쟁 최고의 사령관이다. 미국 육사에서는 매년 생도들을 대상으로 존경하는 장군을 선정하는데, 부동의 1위이다. 요즘은 모르겠다. 소문에는 육사에 있던 리의 흉상도 철거했다고 한다.
덕이 아니라 공을 기린다는 기준에서 보면 동상 철거는 부당해 보인다. 특정 집단의 정치적 견해가 과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종차별’과 ‘인종차별을 빙자한 정치적 속셈’을 나누기도 애매하다. 정서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이 동상이 인종차별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걸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해당 인물의 총체적 인격이 아닌 공’을 기린다는 원칙도 전가의 보도가 될 수 없다. 당장 로마 황제들의 동상은 ‘황제’라는 자리가 지니는 정치적 의미 덕분에, 게다가 로마 황제들이 자신들을 신격화한 덕에 로마의 피지배 민족과 기독교의 이단 사냥에 먹잇감이 되었다. 소련이 무너졌을 때, 레닌과 스탈린의 동상도 끌어내려졌다. 우리나라에서도 정치적 격변기마다 동상과 기념비들이 수난을 당한다.
동상은 앞으로도 계속 세워지고, 쓰러질 것이다. 이런 현상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동상 자체가 정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공’을 기린다고 해도 어떤 공로들은 자체적으로 정치적이고 이념적이다. 아무리 순수한 공적이라고 해도 동상 자체가 그 체제의 이익 및 이데올로기와 연결되어 있다. 민주사회에서 한 국가의 모든 시민은 정치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동상을 둘러싼 논의의 수준, 그 속에 내포된 사회의 관용도와 융통성만은 경각심을 가지고 검토해야 한다. 칼날 같은 정의감은 세상이 피를 흘리게만 했지 세상을 구한 적이 없다.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