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계절에 보내는 別書
비가 내려 산과 들이 부드럽게 젖는다. 사물들이 제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이런 날엔 명상가가 된다. 창문에 기대어 가만히 밖을 바라보면서 나 혼자만의 ‘비멍’을 즐긴다.
뉴스 전문채널에서 노란색 짧은 원피스의 기상캐스터가 전하는 일기예보가 명랑하다. “올해 여름은 예년보다 장마가 더욱 길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제주도를 시작으로 7월 말까지 계속될 것으로 전망되며, 기후변화로 인해 시기가 변동될 수 있습니다. 장마철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각 지역별로 필요한 대비책을 철저히 준비하시고, 기상청 앱을 활용하여 최신 기상정보를 지속적으로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주말 아침, 장마가 길어진다는 뉴스를 들으며 둘둘 말아 올린 머리에 잠옷차림 그대로 베란다로 나간다. 구름이 무겁게 하늘을 덮고 있는 도시는 잿빛풍경이다. 바람은 부드럽게 불어와 머리카락을 살며시 흩날린다. 새벽에 내린 빗방울이 방충망에 걸려 가볍게 미끄럼을 타며 떨어진다. 집 앞 소공원의 남천은 녹색으로 생기 가득 하고, 팬지꽃들도 빛깔이 선명하다. 좁은 베란다에도 식물들이 저마다 향기를 내뿜는다.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정성을 쏟아 키운 제라늄 화분들은 삽목을 거쳐 20개로 증식해 분홍, 주황, 노랑의 꽃을 피우고 있다.
마음껏 빗소리를 들을 수 있는 비의 계절이 돌아왔다.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켜며 목을 좌우로 기울이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다. 갱년기 불면증으로 매일 밤 유튜브에서 들려주는 빗소리를 들어야 잠을 청할 수 있다. 장독대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 양철지붕위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어린 시절 추억을 소환한다.
장마철 꿉꿉함을 없애기 위해 어머니는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자주 배앓이를 했던 나는 온기가 남은 아랫목에 배를 붙이고 엎드려 있기를 좋아했다. 달팽이 촉수 같은 두 귀를 쫑긋 세우면 창호지 너머로 온갖 소리들이 들려왔다. 똑똑 처마 끝에 물 듣는 소리, 새소리, 닭 우는 소리가 흘러왔다. 그럴 때 접시꽃은 그 소리를 다 담느라 꽃잎을 펼치고 대문 밖에 서 있었다. 막내 오빠와 마을 언덕에 올라가 흘러내리는 빗물을 막아 둑 터트리기는 빼놓을 수 없는 재미난 놀이였다. 주변의 흙을 손으로 끌어 모아 몇 개의 둑을 층층이 쌓았다가 터트리면 한꺼번에 물이 쏟아졌다. 우린 그걸 보며 신이 났다. 비에 흠뻑 젖어 집으로 돌아오면, 추위에 오들오들 떠는 나를 본 어머니가 부엌 몽당 빗자루로 오빠의 등을 때리며 야단을 쳤다.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켠다. 장마가 시작될 때면 해마다 보는 일본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클릭한다. 이치카와 다쿠지의 소설을 2004년 영화 로 만든 것으로, 사랑과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감동적인 영화다.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라 남겨진 사람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나라에서도 2018년 리메이크 돼 소지섭과 손예진이 주연을 맡았었다.
나는 영화 속 여주인공이 타임스립을 해 창가에 무릎을 세우고 있는 모습을 좋아한다. 그 젖은 눈망울에 한 없는 그리움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해바라기 밭에서 여주인공이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은 서로를 향한 진심과 약속을 담고 있어 울컥하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매년 찾아오는 장마에 대비할 것들이 많다. 갑작스러운 폭우는 저지대와 도로를 물바다로 만들 수 있다. 몇 해 전 포항을 덮친 ‘힌남노’ 때는 취재를 위해 나갔다가 도로 침수로 곤란을 겪었다. 차량은 고지대에 주차하고 폭우가 예보되면 운전을 자제해야 한다.
비 오는 날 전기 제품 사용을 최소화하고 손이 젖은 상태에서는 전기 기구를 만지지 말아야 한다. 집 주변 배수로를 정기적으로 확인하고 청소하며, 기상청이나 재난 안전 기관의 정보를 주기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경고가 발령되면 즉시 대피할 준비를 해야 한다.
건강관리도 중요하다. 습도가 높아지면 곰팡이와 세균이 번식하기 쉬우므로 실내 환기를 자주 하고, 음식을 신선하게 보관해야 한다. 외출 시 우산이나 비옷을 준비하고, 낙뢰 시 나무 아래나 높은 곳은 피해야 한다.
한 사나흘 비가 내린 후 잿빛 구름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파란 하늘을 좋아한다. 그럴 때는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돈다. 물웅덩이가 있으면 피하지 않고 마치 십대 소녀 감성으로 돌아가 그대로 돌진한다. 물이 ‘촤’ 하고 옆으로 퍼지면 그걸 피하기 위해 다리를 양 옆으로 한껏 펼친다. 그리고 신나게 자전거 페달을 돌리며 경보기를 엄지손가락으로 튕긴다.
“따르릉” 누군가 내 뒷모습을 바라봐 주기를 기대하면서…. 김희동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