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식민주의
2024-08-08 뉴스1
그녀는 버지니아의 기독교 기반의 홈스쿨링 교육을 받은 뒤 주님의 부르심을 확신하며 우간다 아이들을 위한 자선단체를 설립했다. 처음에는 그녀가 자선단체를 설립하면서 겪은 일들을 블로그에 올렸다. 그러던 중, 2011년 10월 어느 아침 그녀의 자선단체로부터 먼 곳에서 한 부부가 작은 봉지를 들고 왔다. 그 안에는 이불 위에 9개월 된 아주 작지만 붓기가 심하고 창백한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몇 주 전부터 아팠지만 집 근처에 아이를 치료할 만한 곳이 없었다. 아이의 친척 중 하나는 백인 의사가 있는 병원을 찾으라고 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20살의 르네는 의사가 아니었다. 그녀의 센터도 병원이 아니었다. 그 일 이후 르네는 2015년까지 940명의 중증 영양실조 아이를 치료하다가 105명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영양실조는 단순히 우유나 식사를 제공하는 것으로 치료되지 않는다. 중증 영양실조의 상태에서 우리 몸은 생존하기 위해 자신을 소진하기 시작한다. 세포내 효소가 적절한 기능을 멈추면서 주요 장기도 그렇게 된다. 그러다가 영양소가 갑자기 들어오면 체액과 전해질의 거대한 전환이 일어나면서 영양재개증후군(refeeding syndrome)이라는 치명적일 수 있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선진국의 아동집중치료실에서는 의사가 환자의 전해질 수준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치료의 수준을 조절한다. 르네는 그런 수준의 치료를 할 수 없었다.
평소 르네의 어머니는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가르치기 위해 교사면허를 가질 필요가 없다”거나 “반창고를 붙이기 위해 의료인이 될 필요가 없다”며 자원봉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자원봉사는 중요하다. 구조화되어 사각지대가 많은 정책들 틈에서 사회를 풍요롭게 하는 윤활유 역할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속적으로 남을 돕기 위해서는 사려 깊은 배려와 더불어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너무도 자주 우리는 돕기 위한 사람들보다 자신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이들’을 돕고 싶다가 아니라 ‘내’가 이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종종 자신이 어떤 분야의 전문가이거나 종교인일 때 두드러지는 경향이 있다. “여기 사람들은 이것도 몰라” “이런 시스템은 여기에는 기대할 수 없지” “자기들이 뭘 하고 싶은지 알겠어?” 등등의 생각에서 나아가 “이런 건 나밖에 못해” “내가 이 사람들을 구하겠어”라는 데까지 나아가면 우리 안에 식민주의가 있다고 명확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간다에 아이를 치료하기 위한 병원이 없고 의료진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우리의 단편적인 선입견이자 무지이다. 르네도 이곳은 ‘아프리카’이기 때문에 이 아이를 도와줄 사람이 자신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나중에는 그 센터에서 고용한 간호사가 의료적인 지식에 기반한 조언을 해도 무시하기 시작했다.
종교적 신념을 기반으로 한 국제 활동들은 실제로 빈곤과 질병 퇴치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네의 경우처럼 적어도 표면적으로 남을 섬기기 위한 기독교 정신으로 시작한 많은 중저개발국 대상의 활동들이 다큐멘터리 제목처럼 ‘구원자 콤플렉스’에 걸리기 쉽다. 근대 식민지 개척의 시기에도 선교사들이 그 첨두에 섰다는 것은 뼈아픈 진실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린다고 하지만) 세상은 타락했고 우리가 구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종종 그러한 생각들이 기독교가 무례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곤 한다. 무언가 공짜로 주면 시혜를 베풀면 그들이 변화하고 삶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여러 시도들이 심지어 몇몇은 성공 사례라고 회자되지만 지속하지 못하거나 해를 끼치는 경우도 많다.
아이들 놀이터에 있는 회전무대를 아프리카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 동력으로 활용하기 위해 설치하는 노력들이 있었다. 설치가 완료되고 아이들이 없던 것이 생겨서 신나게 놀며 돌리면서 물이 넘쳐나는 광경은 극적이다. 그러나 회전무대를 더운 나라에서 아이들이 얼마나 탈까. 회전무대는 마을의 흉물로 방치되기 일쑤였다. 탐스 신발을 구매하면 중저개발국 아이들에게 신발을 기부하는 시도는 어떠한가. 사회적 기업정신을 기반으로 기부한 신발로 인해 그 지역에서 만들어진 신발 제품의 가격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결국 일자리가 없어져 현지인을 더욱 빈곤하게 만드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다. 선의의 종교 단체가 병원이 없는 곳에 병원을 지어주고 의사를 파견하며 무료로 의술을 베푼 결과, 환자들이 현지 병원에 가지 않아 지역의료체계를 붕괴시키고 현지 의료진이 배우고 성장할 기회를 빼앗는 경우도 있다. 사회공헌의 정신이, 희생과 섬김의 정신이 우리의 몰지각에 높은 자존감이 더해져 해가 되는 경우는 쉽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중저개발국의 어려운 상황을 바꾸지 못하는 것은 선의가 없어서가 아니다. 전략이 없어서다.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려는 전략, 그들의 마음을 품어주려는 전략,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하는 전략, 그들이 변화의 주도권을 가지게 하려는 전략, 우리의 도움에 의존적이 되지 않도록 하는 전략 등이다. 그래서 원조활동 사업 특히 국제보건은 자선사업이 아니다. 자원봉사도 아니다. 선의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어떤 면에서 생명을 직접적으로 다루게 되는 국제보건활동은 자선사업, 자원봉사식의 활동을 지양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타 분야의 삭감 속에서도 해외 원조 예산은 증가하여 올해 6조원을 넘는 역대 최대 규모가 되었다. 우리 안에는 그러한 식민주의 의식이 없는지 점검해야 할 때다. 국제보건 활동 중에도 자선사업이나 자원봉사식으로 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려 하지 않거나, 실제와 다르게 역량을 평가절하하거나,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으려 하거나, 우리나라의 어떤 것을 그대로 이식하려고 하거나 등등 여러 모양으로 식민주의는 나타날 수 있다. 소위 ‘K’를 붙여서 고유명사로 만드는 것은 우리 안의 자부심을 높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너희는 못하고 우리만 할 수 있다는 편협한 생각으로 나아가서는 안된다. ‘우리’의 역량을 부각시키기 위해 ‘그들’의 것을 깎아내려서는 안된다.
중저개발국에서의 자원봉사 활동 사진을 보면 많은 경우 그들이 누구인지 보다, 어떤 활동을 했는지보다 봉사단 자신들을 더 집중해서 찍은 경우가 많다. “이런저런 활동을 한 게 우리에요”보다 “이 사람들은 누구에요”라고 말하는 것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르네도 어린 나이에 하나님께 ‘헌신’을 하였지만 깊은 곳의 자기 중심성은 놓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게 실은 성경에서 말한 ‘죄’인데 말이다. 그와 비슷한 나이의 선교사들 사이에서 르네는 일종의 ‘워너비’였던 것 같다. 그들에게 어린 나이에 헌신하여 선교지에 가고 아이들을 섬기는 자선단체도 설립하고 현지 아이를 입양했다는 것은 일종의 자기성취이자 자기만족이었다. 2011년 르네의 새해 파티에는 그런 어린 선교사들이 모였다. 그들은 모두 백인이었고 아이들은 다들 입양한 흑인이었다고 한다.허종호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