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탄(高靈歎)의 음미 ③

2024-10-21     경북도민일보
상공은 묵묵히 말이 없고, 하늘만 쳐다보며 긴 한숨을 내뿜는다. 인생이 끝내 여기 그치고 마는가?

진나라의 명의 곽경순(郭景純·일명 郭璞)의 「청낭록」을 볼 수는 없는가. 여동빈(呂洞賓)의 장생약을 구할 수가 없는가. 중국 명의의 대명사로 편작과 화타를 친다는데 알아볼 길은 없는가?

시시각각으로 정신이 몽롱하고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죽음의 그림자는 차차 다가오는데, 저지른 죄악을 풀어냄으로써 죽음의 저승길로 들어 갈 수 있고, 가슴 깊이 뉘우치고 한탄함으로, 죽음의 속박에서 조금은 풀리게 된다. 인과응보에 따른 죄업으로 이승과 저승을 떠도는 객귀(客鬼)에서 벗어날 길은 정말 없는 것일까.

59년이 잘못이라 59년의 일들은 역력하고 다시 새롭구나. 이 새롭고 역력한 것은 상공(신숙주) 마음 스스로 잘 알리라.

22살에 진사에 합격하고, 23살에 장원이 되었으며 30에 중시(重試)에 급제하니 40에 판서에 올랐도다.

진정한 선비는 본시 남의 글을 본뜨거나 꾸어 씀을 허락받지 못하고 태어난 고독한 존재에다, 소신을 굽히지 않고, 주관을 관철시키는 숙명적 투사로, 외로움에 무릎 꿇지 않고, 어둠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대쪽 같은 금기의 연속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그만 현실에 갇혀 미래를 보지 못하고, 용렬한 기회주의에 편승하여 유취만년(遺臭萬年·더러운 이름을 먼 장래에까지 끼침)의 우를 범한 후회를 이제 와서 한탄한들 때는 이미 늦었구려.

30년 전을 생각하니 세종대왕을 만났을 때라, 세종은 대성인으로 선비 재사(才士)를 금옥같이 사랑하며 나를 집현전에 있게 하고, 또한 소신(小臣)을 호당에서 글을 읽게 하셨다.

수라간에서 반찬을 보내고 내부(內府)에서는 지필묵을 보내왔다. 내시는 임금(세종대왕)의 안부를 전하고 나인은 임금이 내린 술을 가져온다. 어주 너덧 순배를 돌리고 아악풍류는 그칠 줄을 모른다.

글과 술이 곁들인 담소의 잔치(문주담연)가 이어지며, 자연의 느낌으로 산은 산대로 있고, 글은 글대로 있는 것은 범인의 경지이고, 진정 선비의 경지에 다다르면 산을 보니 글이 보이고, 글을 보니 산이 보이는 경지에 다다러야 된다고 한다. 그러자면 문전지적(文典地籍)에 상통하는 백가구류(百家九流)가 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곱디고운 비원의 꽃과 아름다운 연꽃의 달빛이라, 소신은 진흙같이 취한 끝에 달은 지고 약향기(어의의 향기)가 뼈에 스며든다. 미향(美香)에 눈을 뜨니 빛나는 붉은 수달피 가죽 옷이라, 놀라 돌아보니 이 어인 일인고? 성주(聖主·세종)께서 손수 벗어서 소신이 취해 누운 몸에 덮어 주셨다. 소신은 취해서 알지 못했으나, 그 은혜 흠감하여 죽을 바를 몰랐다.

맨손의 의(義)와, 칼자루의 불의가 죽고 사는 절대 절명의 시기에 주저 없이 불의에 저항한 올곧은 선비의 면면을 꼽아본다.

인수(박팽년)는 경술(經術)을 좋아했다. 충청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공문에는 신(臣)이라 쓴 일이 없고, 근보(성삼문)와 같이 ‘전하’라 하지 않고 ‘나리’라 불렀다. 이것은 마음속에서 울어 나온 의분의 이름으로 토해내는 울부짖음이 이렇게 만들었다. 녹으로 받은 양식은 먹지 않고 헛간에 쌓아 뒀다. 재능을 아낀 세조의 회유를 끝내 뿌리친 의기의 남아였다.

근보(謹甫·성삼문)는 문장이 좋았다. 정음청에서 한글창제에 힘써 「훈민정음」을 반포케 하는데 일조했다.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이고 집현전 학사들에게 정난공신의 등급을 내릴 때, 축하연에 불참하는 대담함을 보였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예방승지로 ‘국새’를 끌어안고 대성통곡했다. 아버지 승(勝)과 신지(信之·유응부)가 명나라 사신 송별연에 운검(雲劍·의장〔儀仗〕에 쓰던 칼)을 잡게 되어 이때 세조를 죽이고 한명회, 권람, 정인지 등을 제거하기로 했으나 운검을 그만 두게 되어 기회를 날려버렸다.

중장(仲章·하위지)은 경제사(經濟士)며 문장가로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조 판서에 이르렀다. 침착하고 과묵한 성격으로 세조의 측근이었으나 피 끓는 젊은이로 받은 녹은 먹지 않고 별실에 모아두었다.

백고(伯高·이개)는 재주가 많고, 시문이 청절하며 글씨를 잘 썻다. 이색의 증손으로 직제학에 이르렀다. 세조와 친교가 있어 진상을 밝히려 회유했으나, 구차하게 사는 것보다 영원히 사는 길을 택했다.

태초(太初·유성원)는 영걸한 젊은이다. 집현전학사로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아 사가독서를 했다. 단종 복위를 꾀하다 탄로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음으로 불의에 항의했다. 시조 한 수가 전한다.

신지(信之·유응부)는 유학에 뛰어난 절의파 학자로, 무과에 급제 기골장대하고 문무에 탁월하다. 벼슬은 동지중추원사에 이르고, 명나라 사신 송별연에 운검을 잡게 되어 성승(성삼문의 아버지)과 같이 세조의 목을 따려했으나 운검의 취소가 천추의 한으로 남게 되었다. 시조 3수가 전한다.

소신(小臣·신숙주)도 이들과 같이 놀았는데 놀면서 무엇을 하였던고 -. 신중히 조심하여 서로 잊지 말자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영원한 동료지정의(情誼)와 붕우유신을 얼마나 되 뇌이며 그 많은 날들을 보냈던가. 그렇거늘 어느 뉘라 그렇지 않다고 거절하겠는가? <계속>

이준걸 전 국사편찬위원회 사서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