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열사의 행복했던 옛집’… 대구시민 손으로 다시 지었다

전태일친구들, 전태일 옛집 개관식·54주기 추모식 함께 진행 시민 등 성금 모아 복원… 노동자 인권 등 위한 사업 진행 예정

2024-11-13     김무진기자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상징인 대구 출신의 노동운동가 고(故) 전태일 열사(1948~1970) 산화 54년을 맞아 그가 유년기에 살았던 고향 대구 옛집이 정식 복원, 시민들에게 개방됐다.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은 13일 오후 6시 대구 중구 남산동 2178-1번지에 자리한 한옥에서 ‘전태일 54주기 추모식 겸 전태일 옛집 개관식’을 가졌다. 행사는 ‘시민이 만든 기적, 열여섯 살 전태일의 귀향’을 주제로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송필경 전태일의친구들 이사장과 열사의 여동생인 전순옥 전 민주당 국회의원, 이승렬 전 영남대 교수회 의장, 노동계 인사, 신명여중 학생 및 교사를 비롯한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사 낭독, 기부자 축사, 축하공연, 시 낭송, 기념식수 등으로 펼쳐졌다.

남산동 한옥은 전태일 열사가 생전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보냈다’고 일기장에 적은 유년시절 옛집이다. 열사는 청옥고등공민학교(현 명덕초교 강당 자리) 재학 시절인 1962~1964년쯤 이곳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여섯 가족이 살았던 셋방은 함석 지붕을 이고 있던 약 3.8평(12.5㎡)의 공간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열사의 가족은 이 공간에서 2대의 재봉틀을 갖추고 봉제 일로 생계를 이어갔다. 열사의 모친 이소선 여사(1929~2011)가 당시 동산병원 담장에 걸려있던 구호품과 헌 옷을 사 오면 열사와 동생들이 실밥을 뜯고 다림질했다. 그 옷감을 아버지가 재단해 새 옷을 만들어 놓으면 이 여사가 되팔아 생계를 잇던 시절이었다.

열사는 학교에 가기 전 오후 4시 30분까지 봉제를 하면서도 벽에 영어 단어를 붙여 놓고 외울 만큼 배움 열기가 컸다고 한다. 하지만 1963년 11월 학업을 중단하게 됐고, 1964년 2월 가족들은 생계를 위해 대구를 떠나 상경했다.

서울로 올라온 열사는 1965년부터 평화시장 봉제공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며, 비인간적인 노동 조건에 깊은 문제의식을 갖고 열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 고통받는 동료 노동자들의 실태를 알리는 데 힘썼다. 그러다 열사는 1970년 11월 13일 22세의 젊은 나이에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라는 절규와 함께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산화했다.

열사의 값진 희생은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투쟁의 불씨를 지폈고, 이후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가 시작됐다. 그의 죽음은 사회 전반에 걸쳐 노동 문제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고, 더 나은 노동 환경을 만들기 위한 사회적 논의를 활발하게 만들었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투쟁은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동력이 됐다.

개관한 열사의 대구 옛집은 지난 2015년 유족과 열사 지인들의 증언으로 존재가 알려졌다. 비록 열사와 가족이 살았던 셋방은 사라졌지만 그늘과 그늘을 옮겨 다니며 살았던 전태일 삶의 흔적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이곳의 존재를 알게 된 시민과 시민단체는 “전태일의 고향인 대구에서 전태일의 옛집을 복원시켜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 지난 2019년 3월 ‘전태일 옛집 살리기 시민운동’을 시작했다. 대구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3200여명이 약 5억원을 모아 지난 2020년 옛집을 사들여 ‘전태일 문패’를 달았다. 이어 지난해 허물어져 가던 집을 복원하기 위한 2차 모금운동에 나서 지자체나 정부의 지원 없이 시민 모금과 후원으로만 약 8억원의 복원 경비를 마련, 공사를 거쳐 최근 사업을 마무리했다.

옛집 복원 과정에서 허물어졌던 방과 마당 공간이 생기고, 전 열사가 앉았던 의자와 읽었던 책을 상징하는 동판 조형물 등이 제작됐다.

전태일의친구들 측은 “전태일 옛집 복원은 오로지 시민 성금과 뜻으로 이뤄낸 값진 성과”라며 “열사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공간에서 열사가 남긴 인간 존엄, 노동자 인권, 평등사상을 이어가는 다양한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