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 친근한 사물이 들려주는 낯선 깨달음
  • 이경관기자
일상 속 친근한 사물이 들려주는 낯선 깨달음
  • 이경관기자
  • 승인 2016.07.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은희경 여섯번째 소설집

[경북도민일보 = 이경관기자] 세상에 지쳐 어디론가 숨고싶을 때, 누군가 내게 앞으로 “더 좋아진다는 뜻”이라고 말해준다면 그것만큼 좋은 위로는 없을 것이다.
 이름만으로 하나의 브랜드가 된 작가 은희경은 최근 출간한 여섯번째 소설집 ‘중국식 룰렛’을 통해 삶에 지친 우리를 토닥인다.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 ‘상속’을 비롯해 장편소설 ‘새의 선물’,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등으로 이십년이 넘는 세월 동안 꾸준히 독자들에게 사랑 받아온 은희경은 이번 소설집에서도 외롭고 지친 마음을 보듬는다.
 소설집 ‘중국식 룰렛’에 실린 여섯편의 소설 역시 각기 다른 성광과 매력을 뽐내며 일상의 우연들이 얼마나 소중하게 연결돼 있는지를, 행운과 불운이 교차하는 날들이 얼마나 공교롭게 우리를 이끄는지를 은희경 특유의 섬세하고 정련된 필치로 펼쳐 보인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영화에서 제목을 따온 표제작 ‘중국식 룰렛’은 악의를 감추기 위해 우연을 가장하고 모습을 드러내는 공교로운 운명을 다룬다.
 ‘중국식 룰렛’은 일종의 진실게임으로, K의 술집에 모인 네명의 남자들은 라벨이 감춰진 위스키를 마시며 진실보다는 거짓에 기대는 게임을 한다. “소설 곳곳에 스민 위스키향”(황정아 해설)은 우리를 뜻밖의 운명으로 매혹하고, 그들은 저마다 자신의 불행을 한탄하며 절반의 거짓과 절반의 진실이 뒤섞인 정직한 거짓말들을 쏟아낸다. 진실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던지는 은희경의 질문들은 채워지지 않는 진실로 향하게 하는 열쇳말인지도 모른다.
 “당신의 가장 큰 실수는 무엇입니까. 당신이 평생 후회할 만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질문과 대답들이 오고 갔다. 실수와 후회. 분명 그럴 만한 일들이 있었다. 그 댓가로 나는 K의 술집에서 가장 형편없는 술을 선택할 각오로 이곳에 왔다. 그의 게임에 말려들어 아내일지도 모르는 여자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분명 망상일 것이다. 사실은 그냥 라가불린을 좋아하는 어떤 여자의 이야기이다. 상관없다. 집에 돌아가면 아내의 컬렉션이 우리의 가장 좋은 시절을 담고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의 행운을 가득 채운 차가운 술병들이. 그것들이 있는 한 천사에게 2퍼센트를 돌려달라고 억울해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술잔을 내려다보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자신이 운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중국식 룰렛’ 중 52쪽)

 이 외에도 다섯 작품은 술, 옷, 수첩, 신발, 가방, 사진, 책, 음악 등 우리가 늘 가까이하고 삶에서 놓을 수 없는 사물들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이 모티프들은 곁에 사람은 없고 사물만 있는 “예상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 살아가는”(‘불연속선’ 중 137쪽) 사람들이 위안을 느끼는 유일한 온기의 ‘대용품’들인지도 모른다.
 소설 속 인물들은 대개 표정을 감추고 상대에게 속마음을 보이지 않거나 “현실을 수긍하고 거기에 맞춰 자신의 입장과 한계를 정하는”(‘별의 동굴’ 143쪽) 고립되고 단조로운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이들 주변의 사물들이 담고 있는 이야기는 한 개인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의 실상을 그대로 담아낸 것이다.
 은희경은 이번 소설집에서 삶은 작은 우연들로 이뤄져 있다는 익숙하지만 낯선 깨달음을 일깨워준다.
 헛헛하고 단조로운 삶도 텅 빈 완성에 이를 수 있음을, 오래 울었던 얼굴을 누군가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결코 허황하지 않음을 은희경은 가벼워진 마음과 따뜻한 목소리로 말해준다.
 은희경 지음. 창비. 216쪽. 1만2000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기사
  • 경북 포항시 남구 중앙로 66-1번지 경북도민일보
  • 대표전화 : 054-283-8100
  • 팩스 : 054-283-5335
  • 청소년보호책임자 : 모용복 국장
  • 법인명 : 경북도민일보(주)
  • 제호 : 경북도민일보
  • 등록번호 : 경북 가 00003
  • 인터넷 등록번호 : 경북 아 00716
  • 등록일 : 2004-03-24
  • 발행일 : 2004-03-30
  • 발행인 : 박세환
  • 대표이사 : 김찬수
  • 경북도민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북도민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HiDominNews@hidomin.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