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한 폭력’ 난무한 일상 날카롭게 담아내다
  • 이경관기자
‘상냥한 폭력’ 난무한 일상 날카롭게 담아내다
  • 이경관기자
  • 승인 2016.10.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이현 작가 세번째 소설집

[경북도민일보 = 이경관기자]  “나는 그럭저럭 살아간다. 이런 시대에 이렇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최악을 모면하며 살아가는 것을 그럭저럭,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소설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 중)
 오늘의 ‘너’와 ‘나’와 ‘우리’를 이야기하는 작가 정이현이 세번째 소설집 ‘상냥한 폭력의 시대’를 최근 펴냈다.
 정이현은 사랑은 발명된 것이라 냉소하며 실리를 추구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담긴 첫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으며 이어 거대한 사건에 가려진 개인의 고통과 상실을 그려낸 제51회 현대문학상 수상작 ‘삼풍백화점’이 수록된 소설집 ‘오늘의 거짓말’을 통해 오늘을 기록하는 작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그녀는 남성 중심적 가치관의 부조리를 비틀어 보여주며 드라마로도 제작돼 신드롬을 일으켰던 ‘달콤한 나의 도시’를 비롯해 알랭 드 보통과 공동 작업한 ‘사랑의 기초―연인들’ 등 동시대인의 삶과 사랑을 증언하는 여러 장편과 산문집을 꾸준히 내왔다.
 이번에 출간한 소설집 ‘상냥한 폭력의 시대’는 2013년 겨울부터 발표한 소설들 가운데 일곱 편을 추려 묶은 책이다.
 그녀는 ‘도발적이고 발칙하며, 감각적이고 치밀’한 작가라고 불렸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그의 문장은 여전히 감각적이고 치밀하지만, 톡 쏘는 ‘쿨함’ 대신 ‘모멸’과 ‘관성’이라는 서늘한 무심함을 불러낸다.

 “그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미친 짐승처럼 소리를 지를 수도 있고, 딸을 부둥켜안고 목 놓아 통곡할 수도 있고, 창문을 열고 아래로 뛰어내릴 수도 있었다. 그래도 달라질 게 없었다. 돌려놓을 수 없었다.”(소설 ‘아무것도 아닌 것’ 중)
 정이현이 포착한 ‘오늘’은 친절한 표정으로 무심하게 모멸감을 주고받는 사람들의 시대다. 이 ‘세련된 폭력’은 조금씩 모습을 바꿔가며 소설에 등장한다. 인격을 비하하거나 비아냥거리는 태도를 취한 적은 없지만 오히려 타인에게 아무 태도도 취하지 않음으로써 태도를 완성시키고 번번이 타인을 불쾌하게 만드는 소설 ‘밤의 대관람차’의 원로 정치인 ‘박’이나, 늘 ‘돼지’라고 괴롭힘을 당해왔으나 새로 전학 간 학교에서 놀림거리조차 되지 못하는 리에에게 말 한마디 걸어오지 않는 소설 ‘영영, 여름’의 K국의 아이들처럼, 세대부터 국적까지 상이한 이들의 공통점은 다른 사람들에게 무심코 일상적인 모멸을 가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이에도 ‘상냥한 폭력’은 빈번히 발생한다. 사랑은 때로 상대가 제멋대로 나를 침범하고 휘젓는 것을 묵묵히 견디게 한다. 소설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에서 아버지는 몇 년간 함께 산 연인 ‘미스조’를 동네 밖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소개시킨 적이 없다. 또한 소설 ‘밤의 대관람차’에서 이별을 고하던 남자의 과한 눈물은 어쩌면 어린 연인을 완벽하게 설득시키고 꼼짝없이 이별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위선이었을 것이다.
 정이현은 가족 간에서도 상냥한 폭력은 빈번하다고 말한다. 소설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미숙아를 갓 낳은 고등학생 딸 ‘보미’가 의무와 책임에 대해, 매일 하는 일의 귀중함에 대해 배워가야 한다고 믿으면서도, 엄마 ‘지원’ 자신은 보미가 낳은 아기를 무책임하게 방치한다. 그 아기가 죽을 위기에 처하자 설레듯 가슴이 뛰는 지원은 무섭도록 보미를 사랑하는 게 확실하지만, 아무래도 딸이 원하는 방식은 아닌 듯하다.
 백지은 문학평론가는 추천평에서 “이 책을 펼치자 나는 내가 있는 풍경 속으로 들어왔는데, 아주 먼 세상을 헤맨 것보다 더 힘들고 더 아팠다. 삶은 이제 소비 사회의 욕망으로, 아니면 그 밖의 다른 어떤 ‘욕망’으로 추동된다기보다, ‘관성’ 같은 것으로 움직인다. (…) 모두 무언가를 버티면서 용감해지기를 바라다 다시 무력해지기를 거듭하는 것이리라. 그 세상살이의 저주를 이해하고 또 이겨보려고 우리는 ‘세상 속의 사람들’을 만나러 세속의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책을 또다시 펼치고 그 속으로 들어가보고야 만다.”고 썼다.
 정이현 지음. 문학과지성사. 250쪽.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기사
  • 경북 포항시 남구 중앙로 66-1번지 경북도민일보
  • 대표전화 : 054-283-8100
  • 팩스 : 054-283-5335
  • 청소년보호책임자 : 모용복 국장
  • 법인명 : 경북도민일보(주)
  • 제호 : 경북도민일보
  • 등록번호 : 경북 가 00003
  • 인터넷 등록번호 : 경북 아 00716
  • 등록일 : 2004-03-24
  • 발행일 : 2004-03-30
  • 발행인 : 박세환
  • 대표이사 : 김찬수
  • 경북도민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북도민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HiDominNews@hidomin.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