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지 않는 벽
  • 모용복기자
무너지지 않는 벽
  • 모용복기자
  • 승인 2019.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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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을 통해 자유 부여하는 벽
현대사회 불통 원인이 되기도
국가간 이념 갈등이 만든 벽은
긴 세월동안 뚫리지 않을수도
베를린 장벽 30년전 붕괴되고
트럼프 벽 전동톱에 뚫렸는데
휴전선 철조망은 70년이 돼도
아직 허물어질 기미도 안 보여
어쩌면 눈에 보이는 장벽보다
이념의 벽이 더욱 견고할 수도
모용복 기자
오늘날 인간은 벽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벽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일을 하고 휴식·취침 등 사생활을 영위하며 오히려 자유를 느끼며 살아간다. 그래서 갈수록 벽을 높이 쌓아 올리고 있으니 아파트·오피스텔 등 현대식 건물 대부분이 그러한 결과물이다. 건물 뿐만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은 무형의 벽도 존재한다. 벽을 높이 쌓아 올릴수록 덩달아 사람 사이의 벽도 높아지고 견고해 지고 있다. 근래 들어 우리사회에서 불통(不通)이라는 괴물이 자주 회자되는 이유도 이러한 유·무형의 벽으로 인한 소통 단절 때문임은 말할 것도 없다. 벽은 개인을 넘어 국가 사이에도 존재한다. 국가 간 이념이나 이해(利害)관계에 의해 만들어진 이 벽은 주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비교적 짧은 기간에 허물어질 수도, 장구(長久)한 세월이 걸릴 수도 있으니 전자가 ‘베를린 장벽’이라면 후자는 한반도 허리를 갈라놓은 ‘휴전선’이 대표적인 예다.

지난 9일은 냉전체제의 대표적 산물인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년이 되는 날이다. 이 장벽은 1961년 동독 정부가 인민군을 동원해 동베를린과 서방3개국의 분할점령 지역인 동·서 베를린 사이 40여km에 이르는 지점에 쌓은 콘크리트 담장이다. 1989년 11월 9일 서독으로의 여행 완화조치 시행 시기를 ‘즉각’이라고 잘못 발표하는 바람에 동베를린 시민들이 한꺼번에 몰려들면서 무너졌다. 장벽이 무너지자 동·서독 국경에는 서독으로 가려는 동독 국민들의 자동차 행렬이 줄을 이었으며, 무너진 장벽을 타고 밀려든 민주화의 물결로 인해 마침내 이듬해 10월 분단에 종지부를 찍는 통일조약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이날 베를린에서 열린 30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자유를 제약하는 장벽이 아무리 높고 두꺼워도 결국 뚫린다고 역설했다. 메르켈의 이 말은 과거의 유산인 베를린 장벽만을 두고 한 말은 아니었다. 현재 자유를 가로막고 있는 또 다른 벽인 ‘트럼프 장벽’을 겨냥한 비판의 말이었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이 “절대 뚫리지 않는다”며 호언장담한 장벽이 어이없게도 밀수조직의 전동톱에 뚫린 사실을 조롱한 말이기도 했다.

대내외적인 숱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남미 불법 이민자들을 막겠다며 100억 달러(11조원)를 투입해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 건설한 819km의 장벽은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공약이자 자신의 가장 자랑스런 치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는 이 장벽을 가리켜 “사실상 뚫을 수 없다. 불법 이민자들이 넘어갈 수도, 아래로 지나갈 수도, 통과할 수도 없는 명품”이라며 롤스로이스에 빗대기까지 했다. 그런데 11조원을 쏟아 부은 이 ‘명품’ 장벽이 단돈 11만원의 전동톱에 뚫리고 말았으니, 장벽을 세우고 자국 이기주의, 고립주의로 내닫는 트럼프의 정책이 사실은 허상(虛像)일 수밖에 없음을 메르켈은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한 술 더 떠 독일의 한 시민단체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무너진 베를린 장벽 잔해 일부를 보냈다. 어른 키가 훌쩍 넘는 높이에 무게가 2.7t에 이르는 대형 콘크리트 조각에는 ‘장벽없는 세상을 만드는 데에 미국이 헌신해온 사실을 당신께 일깨우려 이 조각을 보낸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트럼프의 ‘이민 장벽’ 정책을 비판하려는 의도를 모를 리 없는 백악관이 수령을 거부했음은 물론이다. 이렇듯 과거 냉전의 산물인 베를린 장벽은 오늘날에는 세계의 또 다른 장벽을 철폐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메르켈의 말대로 뚫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장벽은 과연 없을까? 30년 가까이 냉전체제를 지탱하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절대 뚫리지 않는다’던 트럼프의 철강콘크리트 장벽도 뚫렸는데 한반도 허리를 잘라놓은 분단의 장벽은 여전히 건재하다. 1953년 6·25전쟁 휴전(休戰)으로 유엔의 정전협정에 따라 설치된 휴전선, 즉 군사분계선이다. 서쪽으로 예성강과 한강 어귀의 교동도(喬棟島)에서부터 개성 남방의 판문점을 지나 중부의 철원·금화를 거쳐 동해안 고성의 명호리에 걸쳐 있는 길이 155마일(250km)의 철조망으로 이뤄진 장벽. 베를린 장벽이나 트럼프 장벽보다도 훨씬 허술한 이 벽이 70년이 다 돼가도록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철조망이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허물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이 벽을 경계로 남과 북이 양쪽으로 나뉘어 이념의 벽을 갈수록 높고 두껍게 쌓아 올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쪽의 대결구도에 따라 어느 때는 약해지는가 싶다가도 어떤 때는 더욱 견고해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남북이 쌓아올린 이념의 벽은 이제 양쪽을 옭아매는 또 다른 철조망이 되어 여기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물론 지난 2년 여간 남쪽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 남과 북의 최고 지도자가 판문점에서 함께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퍼포먼스를 펼치고, 美·北의 수장이 전격적으로 만나 악수를 하는 등 급속한 평화무드 조성으로 장벽이 허물어 질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주기도 했다. 우리는 휴전선을 뚫고 철마(鐵馬)가 개성을 지나 평양으로, 그리고 신의주까지 다시 기적을 울리며 내달리는 꿈을 꿨다. 기차를 타고 백두산 관광을 하게 될 날이 도래(到來)하리란 장밋빛 희망에 젖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환상에 불과했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휴전선은 뚫리지 않았으며 철마는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춰서 있는 것이다. 남쪽이나 북쪽이나 이념의 벽을 허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이상 철조망은 이 땅에서 영원히 걷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남과 북 뿐만 아니라 남쪽의 우리들 사이에도 보이지 않은 이념의 벽을 쌓아 올리고 있는 것은 아닌 지 돌아볼 때다. 철조망보다도, 콘크리트보다도 더 견고한 이 벽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모용복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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