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기사’ 이세돌
  • 모용복기자
‘낭만기사’ 이세돌
  • 모용복기자
  • 승인 2019.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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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바둑 천하통일을 달성한
이창호시대 막 내린 이세돌
AI와 두번째 대결을 끝으로
24년 몸담았던 바둑계 떠나
승리만이 전부인 AI로 인해
승부 일변도로 치닫고 있는
인간성 실종된 바둑계 개탄
놀이가 별로 없던 시절, 동네 형들이 두던 바둑을 어깨 너머로 배웠다. 머리가 굵어진 중·고교 때는 서점가를 뒤지고 심야에 방송하는 텔레비전 바둑 프로를 보며 독학으로 익힌 실력으로 사람들과 어울려 집을 쌓을(계가, 計家) 만한 수준이 됐다. 정식으로 따져본 적은 없지만 급수에서 제법 높은 축에 속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벌써 30년도 더 지난 얘기다.

내가 한창 바둑 재미에 빠져 있을 당시는 조훈현과 이창호가 한국 바둑계를 주름잡던 시절이었다. ‘조제비’ ‘戰神’이라 불리던 조훈현 9단이 세계 최고권위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해 중국과 일본에 한참이나 뒤져 있던 한국바둑을 일시에 그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한중일 ‘바둑 삼국지’ 시대가 본격 열린 것이다. 뒤이어 조훈현의 제자인 신성(新星) 이창호가 등장해 세계대회에서 내로라하는 중국과 일본의 기라성 같은 기사(棋士)들을 차례로 물리치고 천하통일을 달성하며 한국바둑을 세계 정상에 올려놓았다. 당시 그의 나이 10대 중반의 일이었으니 이창호의 천부적인 재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돌부처’라는 별명은 그런 이창호에 대한 경외심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영원할 것 같던 이창호의 시대는 그러나 또 다른 천재기사의 등장으로 막을 내렸다. 장본인은 바로 이세돌. ‘세상의 돌’이라는 이름부터가 특이한 그는 타고난 재능에다 이창호에게는 없는 전투력까지 겸비했다.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며 한 번 공격을 하면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모든 기사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필자는 이창호를 워낙 좋아했으므로 그의 몰락과 함께 바둑에 대한 흥미도 차츰 시들해졌다. 물론 이세돌의 대국을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세돌의 시대에 필자는 다른 흥밋거리를 찾아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던 때였다. 그러니 20년 가까이 국내외 바둑계를 호령하던 이세돌이었지만 필자의 관심에서는 몇 걸음 떨어져 있었다.

그러다 3년 전 그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진풍경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바둑인이 아닌 사람들도 관심을 갖기에 충분한 세기적 이벤트였다. 인간과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AI) 알파고(구글의 인공지능개발 자회사인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인공지능 프로그램)의 대결. 바둑은 워낙 경우의 수가 많고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기계가 인간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정설로 통하던 때였다. 2016년 3월 9일부터 15일까지 총 5회에 걸쳐 펼쳐진 최고의 바둑 인공지능 프로그램과 최강 인간 바둑 실력자의 대결에서 최종 결과는 알파고가 4승 1패로 승리했다.

이 사건은 전 세계에 큰 충격파를 던졌다. 인간의 영역으로 간주되던 바둑에서 세계 최강 이세돌마저 무너진 현실 앞에서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영화에서나 가능할 것 같던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이 도래하리라는 두려움마저 엄습했다. 그리고 3년 후 이세돌이 또다시 반상(盤上)에서 AI와 맞붙었다. 이 9단의 고향에서 열린 은퇴대국에서다. NHN이 개발한 국산 바둑 AI ‘한돌’은 알파고를 능가하는 것으로 평가 받는다. 한돌을 상대로 한 대국에서 1승2패를 기록하며 이 9단은 마침내 24년 간 몸담았던 바둑계를 떠났다.

그는 대국 후 인터뷰에서 “한 판 잘 즐기고 간다. 바둑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20여 년간 ‘인생의 축소판’이라 불리는 반상생활 동안 쌓인 나이답지 않은 연륜이 묻어나는 말이다. 이 9단의 발언 속에는 그 존재의 이유가 오직 승리 뿐인 AI에 대한 씁쓸함이 진하게 배여 있다. AI는 무수히 많은 기보(棋譜)를 입력해 만든 데이터로 최선을 수를 찾는다. 상대보다 한 집이라도 더 많으면 이기기 때문에 모험이나 위험을 감행하는 법이 업다. 모험은 기계의 영역이 아니다. 때때로 어떤 상황에 처하면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을 기꺼이 내던지는 인간의 특성과는 완전히 정반대다. 그래서 AI의 바둑은 무미건조하다. 재미 또한 있을 수 없다. 이 9단은 AI의 등장으로 오직 승부 일변도로 치닫는 바둑계 현실에 대해 개탄한 건지도 모른다. 인간의 상상력과 인간성이 실종된 현실 앞에서 그는 과감히 돌을 거두고 은퇴를 선언한 것이다. AI와 겨룬 마지막 낭만기사로서.

아직 마흔이 안 된 젊은 나이, 이세돌 9단이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지는 미지수다. 많은 길이 열려 있다. 하지만 세계 바둑계를 쥐락펴락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였기에 바둑계를 완전히 떠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20여 년간의 행보가 너무나 강렬했기에 잔영(殘影) 또한 길 수밖에 없다. 비록 AI에 고배를 마셨지만 그가 버티고 있는 한 AI가 인간의 영역을 완전히 점령하진 못할 것이다.

모용복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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