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속삭임’ 데이트 폭력
  • 모용복선임기자
‘악마의 속삭임’ 데이트 폭력
  • 모용복선임기자
  • 승인 2020.10.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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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폭력 사회 문제로 대두
단순폭력 넘어 살인으로 비화
데이트폭력 재범률 절반 넘어
피해여성 절반 가해자와 결혼
범죄에 대한 심각성 인식 못해
死線 넘나드는 여성 구조 위해
법적·제도적 장치 마련 급선무

10여 년 전 술만 마시면 여자친구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회사 직원이 있었다. 이 친구는 평소에는 내성적이고 말이 별로 없다가 술만 한두 잔 들어가면 폭력남으로 돌변한다. 심지어 벽돌로 살해 위협까지 하는 것을 목도한 적도 있다. 유독 자기 여친(女親)에게만 폭언과 폭력을 행사하는데 아마 여성을 소유물로 생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데이트 폭력’이란 말이 없던 시절 얘기다.

이른바 ‘데이트 폭력’이라 불리는 연인 간 폭력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단순 폭행을 넘어서 목숨까지 빼앗는 사태로까지 번지기도 한다.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후 낙엽이 흩날리는 거리를 홀로 쓸쓸히 방황하던 낭만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빛바랜 추억이다.

추석연휴 기간인 지난 3일, 헤어진 애인의 가족에게 흉기를 휘두른 50대 남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헤어진 애인과 집 처분 문제로 다투다 그의 여동생 2명과 동생의 남편 1명 등 가족 3명에게 미리 준비해간 흉기를 휘둘러 살해하려 한 혐의다. 다행히 피해자 가족들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들에게 잡혀 극단적인 사태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자칫 참극이 빚어질 뻔한 아찔한 상황이었다.

이처럼 여성들이 데이트 폭력을 당하는 사례가 갈수록 늘고 있다. 팔목을 움켜잡거나 때리는 등 신체적 폭력뿐 아니라 언어폭력, 데이트 비용 요구, 휴대전화 점검, 옷차림 통제 등 비물리적 폭력도 포함된다. 심지어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경찰청이 지난 6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데이트 폭력 신고 건수는 2017년 1만4136건, 2018년 1만8671건, 2019년 1만9940건으로 해마다 증가추세다. 지난해의 경우 데이트폭력 사건이 하루 54건 넘게 신고 된 셈이다.

데이트 폭력은 단순 폭력을 넘어서 성범죄나 살인 등 강력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한국여성의전화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 의해 살해된 여성은 88명이나 됐다. 살인미수를 포함하면 피해 여성은 적어도 196명에 달한다. 1.8일에 1명의 여성이 애인이나 배우자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죽을 위기에 처했다는 말이다.


데이트 폭력이 이처럼 극성을 부리는 데는 사법당국의 안이한 인식과 솜방망이 한몫을 했다. 피해 여성이 어렵사리 신고해봤자 대부분 벌금형과 같은 가벼운 처벌로 그치고 돌아오는 건 보복의 두려움뿐이다. 또한 경찰에 신고해봤자 연인 간 사랑싸움으로 치부해 입건조차 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처럼 부실한 처벌 탓에 데이트 폭력 재범률은 무려 76.5%에 이른다. 가해자 다섯 중 1명은 1년 이내에 범행을 또 저지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데이트 폭력 피해 여성 절반가량이 가해자와 결혼을 한다는 사실이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데이트 폭력을 경험한 여성 중 절반에 가까운 45%가 가해 남성과 결혼한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 데이트 폭력 경험자 32%도 상대 여성과 결혼을 했다.

이상하지 않은가. 폭력을 당하면서도 왜 가해자와 결혼을 하는 것일까? 결혼을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상대방을 계속 사랑한다고 느끼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 데이트 폭력을 심각한 범죄라고 느끼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폭력 남성이나 여성과 결혼을 해서 평탄한 결혼생활을 영위할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천만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이는 가해자가 개과천선(改過遷善) 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이미 데이트 폭력으로 후유증을 안고 시작하는 결혼생활이 온전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어불성설에 가깝다. 범죄자와 피해자가 한 지붕을 이고 살아가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보고서에 의하면 1번 이상 데이트 폭력을 경험한 여성이 54%로 절반이 훨씬 넘었다. 이는 남성 폭력이 상습적인 것이며, 단지 연애기간뿐만 아니라 결혼 이후까지 이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불행의 씨앗을 안고 시작하는 시한폭탄 같은 결혼생활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불행을 막기 위해선 먼저 데이트 폭력이 심각한 범죄행위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랑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악랄한 폭력을 자행하는 남성들에 의해 오늘도 수많은 여성들이 사선(死線)을 넘나들고 있다. 이제 더 이상 데이트 폭력을 개인적인 일로 치부해선 안 된다.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데이트 폭력을 근절하고 악마의 마수(魔手)에서 여성들을 구해낼 법적·제도적 장치가 시급히 마련돼야 할 시점이다. 모용복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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