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교수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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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교수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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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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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미국에서는 학문 분야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일정한 교육·연구 경력 또는 실무 경력을 갖추어 조교수로 임용되고 그때부터 대학교수의 길을 간다. 대개 5년 정도의 시간이 주어지고 그간에 쌓은 연구실적으로 정교수가 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정년보장, 미국에서는 종신이다.

법학의 경우 미국 로스쿨에서는 법학박사 학위가 요구되지 않는다. 경제학이나 다른 분야 박사학위가 요구되던 시절도 있었지만 미국 로스쿨들은 우수한 인재를 졸업과 동시에 또는 연방법원 로클럭 경력 직후 조교수로 채용한다. 대개 로리뷰 출신들이므로 학생 때 쓴 짧은 논문 한 편만으로 조교수가 되는 셈인데 철저히 실질과 가능성만 보고 학교 구성원들 사이에 고도의 전문적 신뢰가 존재하는 미국식이다.

독일에서는 대학교수로의 길이 제도화되어 있다. 박사학위 논문을 우수한 성적으로 쓴 후에 교수자격과정(Habilitation)을 거쳐야 한다.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대다수 유럽 국가들이 그렇게 한다. 평균 5년 이내의 시간 동안 첫째, 연구실적, 둘째, 교수자격 논문, 셋째, 구술시험, 넷째, 강의 경력 등 네 가지에서 요건을 다 충족해야 한다. 의학의 경우 병원 수련경력이 추가된다.

튀빙엔대의 경우 연구실적은 15편의 독창적 학술논문이다. 그중 최소한 5편은 책임저자여야 한다. 판례평석이나 서평은 원칙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우리로 치면 등재지에 발표되었어야 하고 임팩트 테스트도 통과해야 한다. 교수자격의 핵심인 교수자격논문은 깊이 있는 연구에 집중하지 않으면 나오기 어렵기 때문에 후보자는 학교에서 연구나 교육에 수년간 종사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 과정에서 축적되는 학생들의 강의평가도 참고된다.

박사학위 논문은 대체로 학업과 연구실적 검증 차원에서 평가되지만 교수자격논문은 한 분야에서 독립적으로 연구하고 강의할 능력을 검증받는 논문이다. 해당 학문 전체를 깊이 있게 섭렵했음을 보여야 해서 주제가 매우 포괄적이다. 2019년 뮌헨대 법학부에서 나온 한 논문은 책으로 1055페이지인데 ‘계약자유와 계약의 공정성’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올해는 물권법 분야에서 1496페이지 교수자격논문이 탄생해 화제다.

교수자격논문은 3인의 교수와 2인의 외부인이 심사한다. 외부인은 통상 타대학 교수들이다. 후보자와 함께 연구를 수행한 사실이 없어야 하고 지난 5년간 같은 학교에 재직한 사실이 없어야 한다. 5인의 심사위원은 개인적, 경제적, 업무적으로 독립적인 관계여야 한다.

구술시험은 공개강연과 토론이다. 교수자격논문 주제를 포함해서 3개의 주제를 제출하고 그중 하나가 선정되면 10분간 발표한다. 교수자격이 부여되면 ‘venia legendi’가 수여되는데 라틴어로 ‘가르칠 자격’이다.


독일과 러시아는 1999년에 이상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독일의 교수자격과 러시아의 PhD가 같은 급이라는 내용이다.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 수여되는 박사학위는 이들과 동급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수백 페이지, 천 페이지가 넘는 교수자격논문을 다 읽는 사람은 거의 없다. 부분부분 색인을 통해 참고할 뿐이다. 그렇다면 독일의 제도는 낭비적인가. 후보자들은 통상 자기 학번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들인데 이들을 5년씩 나중에 읽는 사람도 몇 없을 논문 작성에 묶어두는 것이 맞는가.

2004년에 독일식 교수자격과정이 특히 자연과학 분야에서 낭비적이고 소모적이라는 취지에서 미국식 조교수 시스템을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약 6년간 조교수로 임용하고 그 실적을 평가하면 된다는 취지였다. 연방의회에 법안이 제출되었다. 그러나 의학, 인문학, 사회과학 등 분야에서 그 시도에 회의적이었다. 3개 주가 독일연방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했는데 헌법재판소는 교육에 관한 사안은 각 주 정부에 관할권이 있다는 점을 재확인했고 법안은 무산되었다.

사실 수십 페이지에 불과한 학술논문도 읽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논문 작성 프로세스는 연구하고 저술하는 사람을 단련시키고 진지성을 체화시키며 학문하는 스탠더드를 높게 유지시켜 준다. 독일 교수들의 강의 강연과 짧은 코멘트가 그를 내장하게 된다. 간단한 의견 피력이라 할지라도 철저한 전거와 사색이 그 토대임을 사람들은 믿는다. 독일의 교수자격제도는 학문과 학자에 대한 신뢰를 유지시키는 역할을 한다. 낭비가 아닌 것이다.

교수가 아닌 변호사가 명함에 교수라고 쓴 것을 보았을 때 의아했었는데 이 모든 과정을 거친 사람이었다. 즉, 독일에서 교수란 직업 명칭인 동시에 학위명이어서 이 사람을 교수라고 부르지 않으면 결례다. 필자는 뮌헨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교에서 우리로 치면 주민센터에 가서 등록하라고 했다. 가보니 내 경우 외국인 등록 내용에서 내 이름을 Kim에서 Dr. Kim으로 고쳐서 기재하는 것이었다. 교수도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내공 쌓기와 그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와 결과에 대한 사회적 인정, 존경이 독일의 학계, 독일이라는 견고한 국가를 유지하는 것이다. 독일식으로까지 할 수야 없겠지만 대학에서의 공부와 학위, 교수자격에 대한 우리 기준도 언제나 높게 유지되어야 한다. 대학교수의 전문적 의견이 주목받고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는 외형은 커져도 내실은 없는 사회일 것이다. 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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