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어가 울다
  • 경북도민일보
잉어가 울다
  • 경북도민일보
  • 승인 2023.01.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옥한 수필가
김옥한 수필가
정월대보름 달맞이 장소를 몇 군데 떠올리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세 시누이 내외가 우리 집으로 오는 중이란다. 길흉사가 있어야 만나던 사람들이 느닷없이 방문한다니 반갑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오곡밥과 나물반찬 몇 가지만 준비하려던 차에 무슨 음식을 대접해야 할지 난감했다.

남편은 만남이 중요하다며 신경 쓰지 말라지만 모처럼 친정과 처가를 찾아오는 사람들이니 그렇지가 못했다. 평소 식성 좋은 당신 때문에 음식 솜씨가 늘지 않았다며 괜한 투정을 하고 있는데 때맞춰 친한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댐에서 잉어를 많이 잡았으니 먹고 싶은 만큼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남편은 큰소리로 “오늘 메뉴는 잉어찜!”이라며 부리나케 달려갔다.

반찬 걱정이 해소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오곡밥 재료와 묵나물, 찜에 들어갈 갖가지 채소를 준비하고 잉어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도착할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마음이 급해 전화기를 들자 남편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잉어 세 마리 중 큰놈은 엄마가 키우던 개만하고, 작은 놈도 두 자가 넘는다며 자랑이 늘어졌다. 후배와 둘이서 물통에 겨우 넣었는데 큰놈 한 마리만 해도 온 식구 충분히 먹겠다며 목소리가 들떴다. 잉어가 튀어나오지 못하게 비닐 통에 담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단다.

얼마 후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잉어가 우는데 어쩌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길모퉁이를 도는데 트렁크에서 뿌욱-,뿌욱-울음소리가 난다는 것이었다. 차를 세우면 조용하고, 운전을 하면 더 큰 소리로 마치 살려달라는 듯 구슬피 울어 운전이 제대로 안된다고 했다. 목소리에 절실함이 묻어 있었지만 잉어찜을 해야 하기에 조심해서 오라고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기다리는 사람은 안 오고 다시 전화가 왔다. 이놈들이 계속 우는데, 알을 밴 놈이라도 놓아주면 어떻겠냐고 또 물었다. 손님들 도착시간은 임박했고 다른 음식도 준비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당황스러워졌다. 모두들 즐겁게 잉어찜 먹는 모습을 상상하며 기다렸는데 놓아준다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난처해하는 남편 얼굴과 알을 밴 물고기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생명을 잉태하는 것은 거룩한 일이다. 알을 배었다는 말에 이미 내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손님은 뒷전이고 세 마리 모두 놓아주는 게 좋겠다고 했다.

잠시 후 일행이 도착했다. 한 시간이면 도착할 남편은 한참을 더 기다린 후에야 나타났다. 남편이 들어오자 시매부와 시누이들은 인사는 뒷전이고 잉어 이야기를 더 궁금해 했다. 모두들 남편 입만 바라보는 상황에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우리 부부가 잉어를 놓아주기로 작정한 후부터 신기하게 울지 않더라고. 마치 대화를 엿듣고 있는 것처럼 안심을 하는 것 같았어. 안동대교에서 놓아주려고 했더니 차도 많이 다니고 수심이 얕아 망설이던 중, 광덕에 있는 깊은 소(沼)가 떠올랐어. 그곳은 인적도 드물고 수심도 깊어 잘 살아갈 것 같더라고. 가는 도중 맑던 하늘이 구름에 가려지고 빗방울까지 떨어져 마치 사람들 눈에 띌까 하늘이 돕는다는 생각이 들었어. 너무 조용하여 죽은 건 아닐까 불안한 생각에 속도를 내어 달렸지”

“다리 한가운데 차를 세우고 마음을 조이며 트렁크를 열었어. 염려한 것을 아는 듯 잉어는 힘차게 꿈틀거리더라고. 큰놈의 무게에 허리가 휘청거렸고, 온 힘을 다해 알 밴 놈부터 던졌어. 마치 바위가 굴러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흰빛이 강물 가득 번지는데 그 묘한 기분을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었어. 나머지 두 마리도 차례로 놓아주며 부디 가서 잘 살라고 말해주자 답하듯 꼬리를 힘차게 흔들며 가더라고. 석양을 향해 헤엄쳐가는 물고기의 거무스레한 등을 한참 바라보다가 이제야 왔어”

장한 일을 한 아이처럼 이야기하는 남편과 맞장구치며 듣고 있는 가족들의 얼굴이 행복해 보였다. 증명이라도 하듯 바지 주머니에서 오백 원짜리 동전만한 비늘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둘째 시누이는 파평윤씨 시조 탄생과 현손인 윤관 장군이 잉어 떼의 은덕을 입었으니 잘 되었다 했다. 막내 시누이는 잉어는 영물이니 앞으로 우리 집안에 복록을 가져다 줄 것이라며 한술 더 떴다.

나물 몇 가지 밖에 준비하지 못한 밥상이었지만 남편 이야기를 반찬 삼아 모두들 맛나게 저녁식사를 마쳤다. 오랜만에 찾아 온 시매부들께 백년손님 대접을 못해 미안하다고 하자 나물반찬이 너무 맛있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뜻하지 않은 방생 덕분에 대접은 소홀했지만 마음은 훨씬 편안해졌다. 어느 새, 창밖에 크고 밝은 둥근달이 휘영청 떠올랐다. 김옥한 수필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기사
  • 경북 포항시 남구 중앙로 66-1번지 경북도민일보
  • 대표전화 : 054-283-8100
  • 팩스 : 054-283-5335
  • 청소년보호책임자 : 모용복 국장
  • 법인명 : 경북도민일보(주)
  • 제호 : 경북도민일보
  • 등록번호 : 경북 가 00003
  • 인터넷 등록번호 : 경북 아 00716
  • 등록일 : 2004-03-24
  • 발행일 : 2004-03-30
  • 발행인 : 박세환
  • 대표이사 : 김찬수
  • 경북도민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북도민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HiDominNews@hidomin.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