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제는 도인들의 힘 결집해 대신사의
죽음을 원망하고 원을 풀어야 한다고 주장
해월에 그의 스승 수운의 순도일 3월10일
택해 동쪽 영해서 거사 일으킬 것을 요구
해월이 경상도 영양 일월산에 은거한 지 6년째 되던 1870년 10월, 영해에서 도인 이인언이 찾아온다. 이인언은 이필제가 보낸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해월에게 이필제를 만나볼 것을 권고한다. 해월이 거절하자, 이필제는 다섯 번이나 더 사람을 보내며 대신사의 억울한 죽음을 원망하고 원을 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동학교조신원운동의 첫 선언으로 볼 수 있다.
이필제는 수운의 순도일인 3월 10일을 택해 영해에서 거사를 일으킬 것을 요구한다. 영해는 조선 말 대규모 ‘부’ 단위 행정기관으로, 동해안 너른 들녘의 풍부한 물산을 자랑하는 지역이었다. 이필제는 동쪽 영해에서 거사를 일으켜야 신원의 파급효과가 크다고 보고, 도인들이 힘을 결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해월은 여전히 미심쩍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듬해 2월, 해월은 도인들의 의견을 확인하기 위해 영해로 간다. 그리고 도인 박사헌의 집에서 이필제를 만나게 된다. 이필제는 과연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불운한 무인 이필제, 영해에서 동학의 불씨를 키우다
이필제는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향반이었다. 증조부는 태안군수 이완이었다. 그는 무과에 급제했지만 벼슬자리를 얻지 못했으며, 자신의 실력과 재능이 빛을 발휘하지 못하자 사회에 불만을 품었다.
철종 14년(1863년), 그는 동학에 입도한다. 이후 1869년 4월 경기 진천, 1870년 2월 경상도 진주 등지에서 동지를 규합해 변란을 일으켰지만, 두 번의 변란 모두 실패로 끝났다. 실패의 원인은 사전 밀고와 계획의 탄로였다.
이필제는 관의 추격을 피해 동해 바닷가 영해로 숨어들었다. 당시 영해는 신향과 구향의 세력 간 갈등이 깊었던 지역이었다. 이필제가 숨어들 무렵, 구향이 영해 동학 접주 박하선을 고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동학은 신향과 맥락을 함께한 경우가 많았으며, 박하선은 감영에서 고문을 받고 여독으로 사망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필제는 영해의 신향 세력을 모아 거사를 꿈꾸고 있었다. 해월은 수일간 이필제와 함께 머물며 거사 획책을 논의했다. 이필제는 신수가 훤하고 언변이 좋았으며, 그는 끈질기게 해월을 설득했다.
▲동학의 비밀스런 준비와 결전의 날
이미 많은 영해 도인들도 그의 뜻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일부 도인들은 해월에게 그의 뜻을 따를 것을 종용하기도 했다. 해월은 그가 앞장세운 스승 수운의 신원 명분을 거절하기가 가장 힘들었다. 결국 해월은 수긍하고 거사를 결행하기로 한다.
해월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경상도 16곳 접주들에게 내린 동원령이었다. 이에 따라 경상도 일대에서 500여 명의 동학도들이 영해로 집결했다. 거사일은 이필제가 정한 스승의 순도인 3월 10일로 잡았다.
닷새 전, 영해 도인 박사헌의 집에는 150여 명이 모였다. 이들은 도록을 만들고 중군, 별무사, 집사 등의 직책을 정했다. 또한 영해읍성 내 동정을 살피기 위해 미리 세작을 파견하며 용의주도함을 보였다. 박사헌의 집에서 조총과 화약, 도검 등을 준비했고, 조총을 대신할 죽창도 제작했다. 평해 도인 전동규가 제작을 책임졌으며, 죽창은 후퇴로인 우정동주막에 감췄다. 도인들은 관군과 다른 복장으로 청색 윗도리를 입었다. 거사 당일 저녁, 해월은 도인들과 함께 천제를 올리며 거사의 성공을 기원했다. 해월은 유건을 준비하고 술과 식량, 제사에 쓸 소 두 마리와 다른 제수품을 마련했다. 제사는 영해 병풍바위에서 지냈다. 달려온 도인은 500여 명 남짓이었으며, 이들은 소를 잡아 피를 공중에 뿌리고 거사의 성공을 기원했다.
▲영해읍성 점령과 동학의 단기 혁명
도인들은 천제를 올리자마자 30리 떨어진 영해읍성으로 달려갔다. 군호는 도인은 ‘청’, 일반 참가 농민은 ‘홍’으로 정했다. 밤 10시께 미리 내통한 성안 사람들이 서문과 남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이들은 일제히 성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이들은 군기고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부사 이정을 묶어내어 처형했다. 그리고 격문을 내걸었다. 격문에서는 ‘영해부사의 탐학이 극심해 죄를 성토한 것일 뿐 백성을 해칠 의도는 전혀 없다’고 밝혔다. 이정은 당시 탐학한 관리로, 부임하자마자 백성들에게 생일 비용 갹출을 요구하고 소와 쌀을 거둬오라고 다그쳐 원성이 자자했다.
이필제는 관아에서 탈취한 돈 150냥을 부민들에게 나눠 민심을 달랬다. 그는 여세를 몰아 남쪽 20여리 영덕읍성 공략까지 주장했으나, 도인들의 적극적인 반대로 포기하게 된다. 이들은 이튿날 영해읍성을 빠져 나가고, 대부분 자진해산했다. 이필제를 비롯한 강사원, 강수, 전성문 등 도인들은 해월을 모시고 영양 윗대치로 되돌아왔다.
▲혁명 실패, 조정의 병력 출동과 도인들의 도피
조정은 소식을 듣고 안동부사 박재관을 안핵사로 임명하여 경상도로 병력을 출동시켜 진압토록 지시했다.
나흘 후인 15일, 관군은 영양 윗대치를 포위하고 공격했다. 해월과 제자 일행은 천신만고 끝에 탈출해 인근 봉화로 몸을 숨겼다. 낮에는 숨어 지내고 밤에만 산길을 걸어 강원도 영월로 갔다. 영월 소미원에는 수운의 부인 박씨와 세정, 세청 형제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그곳에는 몸을 숨긴 뒤였다. 해월은 이필제가 이끄는 대로 단양군 가산에 당도했다. 해월은 도인 정석현의 집, 이필제는 김창화의 집, 강수와 전성문은 영춘 김용권의 집으로 각각 숨어들었다. 이필제와 정기현은 곧 이곳을 떠나 3개월 후인 8월 2일 문경에서 또다시 난을 일으켰으나 결국 실패로 끝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었다.
▲동학 차원의 교조신원운동의 출발과 그 의의
영해동학농민혁명은 동학 차원에서 교조신원운동의 첫 출발로 평가된다.
이필제는 여러 민란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그가 일으킨 네 차례 변란 가운데 동학의 조직과 도인들이 직접 나선 것은 매우 특이하다. 이 때문에 한 고을 단위의 민란과는 매우 다르다.
조선 말기 민란은 단순히 농민들의 반봉건 봉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영해동학농민혁명은 우선 참가자들의 거주지가 경상도 일대였다. 수운이 동학을 창도한 이래 해월에 의해 가장 많이 포덕이 이뤄진 지방이다. 해월은 수운의 뜻을 받들어 경상도 일대 포덕에 심혈을 기울였다.
해월의 동원령에 따라 경상도 일대 도인들이 모여 일으킨 점도 단순한 민란을 뛰어넘는다. 그밖에 전라도 남원, 충청도 등에서도 수많은 도인들이 참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해월로서는 영해 거사가 후회스러운 사건으로 남게 된다. 스승의 억울함을 풀지 못한 채 동학 조직의 위기만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해월은 조직을 움직일 때 더욱 신중을 기하게 된다.
글·사진=김상조 역사문화답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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