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해교조신원운동 실패로 조직 와해
해월, 충북·강원·경기 등서 도피생활
스승 수운 가족 보호에 최선 다했지만
관의 추적 피하지 못하고 비극적 몰락
도인들, 조선 후기 천주교 공식 승인에
해월이 대도소 세운 충북 보은에 모여
교조 신원·포덕 위한 대규모 집회 열고
日내정 간섭 관련 외세 침략 대응 논의
청일전쟁서 일본이 승리하며 야욕 확인
해월, 1894년 9월 동학혁명전쟁 시작
이후에도 ‘동학혁명’, ‘동학농민운동’, ‘갑오농민혁명’ 등 여러 명칭이 혼재돼 사용됐으나, 2004년 국회에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공식적으로 ‘동학농민혁명’으로 명명됐다. 그리고 2019년, 5월 11일 황토현 전승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동학농민혁명은 을미의병, 제주4·3항쟁, 4·19혁명, 부마민중항쟁, 5·18민주화운동 등과 함께 평등사상과 자유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한 중요한 사건이다. 역사 교과서에서도 동학란, 동학혁명, 동학농민운동 등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어 왔다. 특히 1963년부터 1981년까지는 ‘동학혁명’과 ‘동학혁명운동’이라는 용어가 병행 사용됐으며, 1982년부터는 ‘동학운동’으로, 1987년 이후부터는 ‘동학농민운동’이라는 명칭이 35년간 이어져 오고 있다.
△실패와 고행의 연대기, 영해교조신원운동과 해월의 도피
1871년 동학 조직이 일으킨 영해교조신원운동은 실패로 끝나면서 동학의 일대 전환점을 맞이했다. 진천 출신의 이필제가 해월의 승낙을 받아 일으킨 혁명적 시도는 구체적인 동기 없이 진행되어 해월에게 후회만 남겼다.
이 사건으로 동학 조직은 와해되었고, 도인들은 관군과 일본군의 대대적인 탄압에 직면했다. 관군은 해월 일행을 뒤쫓아 경북 영양의 일월산 자락 용화리를 포위하며 체포에 나섰다.
많은 도인들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지만, 해월은 겨우 몸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몇몇 제자들과 함께 태맥산맥 깊숙이 숨었고, 강원, 충북, 경기 등지로 거점을 옮기며 도피를 계속했다. 이러한 이동은 동학의 포덕 범위를 넓히는 계기가 되었으나 해월에게는 끊임없는 고행의 연속이었다.
△해월의 험난한 도피와 스승 가문의 비극적 몰락
해월은 도피와 은신 생활 중에도 스승 수운의 부인과 자녀 보호에 최선을 다했다. 도인들과 함께 이동할 때마다 집과 생활용품을 마련하고 식량을 구해 주었으며, 관의 눈길이 닿지 않는 마을을 골라 편히 생활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그러나 결국 관의 추적을 피하지 못했다.
1873년 12월, 박씨 사모는 피신 생활과 굶주림 끝에 숨을 거두었다. 장례를 치른 직후, 큰아들 세청은 양양 관아에 끌려가 장살을 당했고, 장기간의 도피로 병약해진 작은아들 세정도 곧이어 세상을 떠났다. 네 딸 중 첫째와 둘째는 시집을 갔고, 셋째와 넷째는 남의 집 민며느리로 흩어져 가문의 몰락이 현실이 되었다.
해월은 스승 가문의 비극을 뒤로하고 산간오지로 거처를 옮기며 포덕과 접 조직을 강화해 나갔다.
△흥선 대원군의 실각과 조선의 개항, 그리고 일본의 야욕
1873년, 흥선 대원군이 실각하면서 조선은 쇄국 정책의 빗장을 풀게 된다. 이로 인해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고, 민 씨 정권이 등장하게 된다. 이 시기에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야욕을 본격화했다.
1875년 5월, 일본은 개항을 강요하기 위해 강화도에서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다. 군함 두 대를 보내 조선 연안을 탐측하며 무력 시위를 벌였고, 조선 정부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그 해 9월 20일, 일본은 강화도를 공격했다. 조선 수비대는 전력을 다해 싸웠지만, 결국 중과부적으로 패배하고 만다.
△동학의 확산과 광화문 복합상소, 신원 요구와 탄압의 시작
동학교단은 천주교의 공인이 이루어지자, 동학에 대한 탄압이 누그러지면서 수운의 죽음에 대한 신원과 자유로운 포덕을 요구하게 됐다.
1892년, 도인들은 공주와 삼례에서 충청도와 전라도 감영에 각각 교조 신원을 요구하는 단자를 올리며, 동학이 이미 경상도를 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세력이 확장되자, 도인들은 고종에게 직접 교조의 신원을 고하기로 결심하고, 1893년 2월 광화문 앞에서 복합상소를 전개했다. 조정은 처음에는 회유책을 쓰다가 곧 기만책으로 돌아섰고, 상소에 참여한 도인들을 색출하여 체포·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도인들 사이에서는 무력 저항의 목소리가 높아지며 분위기가 점차 고조됐다.
△보은 취회와 동학의 변화, 반봉건에서 반외세로
이 시기, 도인들이 몰려든 곳은 충북 보은이었다. 보은은 해월이 1875년 대도소를 세워 머무르고 있던 곳으로, 1893년 3월에는 약 2만3000여 명이 이곳에 모여들었다. 해월이 교조 신원과 포덕을 위한 대규모 집회(취회)를 연 것이다.
이때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내정 간섭이 심화되던 시기였으며, 도인들은 외세의 침략에 대응할 방안을 적극적으로 논의했다. 이와 함께 ‘보국안민’과 ‘척왜양창의’ 같은 정치적 이슈가 부각되면서 동학의 투쟁 목표가 ‘반봉건’에서 ‘반외세’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도인들은 대응 방안을 두고 치열한 토론을 벌였으나, 강경파와 온건파의 의견이 대립하자 해월은 아직 때가 이르다며 집회를 해산시켰다.
△1894년 동학의 9월 기포(起包)와 해월의 결단
1894년 7월, 조선에서 청일전쟁이 벌어졌고, 일본이 승리하면서 도인들은 일본의 국권 침탈 야욕을 깨닫게 된다. 이에 전라도 남접 도인들이 먼저 봉기하자, 동도대장 전봉준은 해월에게 동시 기포를 촉구했다.
기포(起包)란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농민들이 동학의 포 조직을 중심으로 봉기하던 일을 말한다. 포는 일종의 교구제도이다. 접주가 포주(包主)를 겸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개는 여러 접주 중에 덕망과 통솔력이 있는 접주가 대접주 또는 도접주(都接主)의 이름으로 포주를 겸하였다.
해월은 손병희를 통령, 이용구를 부통령으로 임명해 전봉준 부대와 합류시켰다. 1894년 9월, 해월은 청산 문바위(한곡리)에서 전국에 기포령(총동원령)을 내렸고, 이에 따라 북접 도인들은 보은 삼가천변 장내리 평원에 집결했다.
반외세 2차 총동원 동학혁명전쟁이 보은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 모든 실천적 운동의 중심에는 해월이 있었다.
글·사진=김상조 역사문화답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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