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벨트를 가다… 갑오년 동학혁명, 전봉준의 농민봉기와 결사항전
전봉준, 전북 고부서 군수 착취 분노
1894년 농민군 구성·농민봉기 발발
영광·함평·무안서 승리 하며 한양行
조정과 농민군은 지역별 집강소 설치
폐정 개혁안 실시 논의·합의 후 해산
해월, 충북 옥천 문바위 골에 있는
농민군 지도자인 김성원 집에 머물러
‘일본군이 경복궁 점령’ 소식에 결의
‘척왜양창의’ 목표로 총동원령 발령
농민군, 전봉준 있는 논산으로 급파
전봉준, 전북 고부서 군수 착취 분노
1894년 농민군 구성·농민봉기 발발
영광·함평·무안서 승리 하며 한양行
조정과 농민군은 지역별 집강소 설치
폐정 개혁안 실시 논의·합의 후 해산
해월, 충북 옥천 문바위 골에 있는
농민군 지도자인 김성원 집에 머물러
‘일본군이 경복궁 점령’ 소식에 결의
‘척왜양창의’ 목표로 총동원령 발령
농민군, 전봉준 있는 논산으로 급파
군수는 도망갔지만, 봉기는 성공했고, 전봉준과 농민들은 창고를 열어 식량을 나누어주고 문서들을 불태웠다. 조정은 안핵사 이용태를 보내 민심을 달래고 민란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오히려 백성들은 더 크게 실망했다. 이용태는 장흥 벽사역의 역졸 800명을 이끌고 와, 주모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마을마다 수색하며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체포하고 재산을 약탈했다. 심지어 부녀자들을 겁탈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이 상황을 참다 못한 전봉준은 무장으로 달려가, 무장접주 손화중과 함께 농민군 연합부대를 구성했다. 이들은 ‘제폭구민’과 ‘보국안민’을 외치며 결사항전을 선언했고, 고부 백산성에서 한양으로 향하는 출정식을 가졌다.
농민군은 영광, 함평, 무안을 거쳐 승리를 거듭하며 진격했다. 정읍 황토현에서는 전라감영 관군과 싸워 이겼고, 장성 황룡촌에서는 기관포와 양총으로 무장한 한양 경군을 무찌르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들은 파죽지세로 전주성에 입성했다. 전주는 조선왕조의 발상지인 경기전이 있는 곳이었다. 조정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농민군과 화해를 시도했다. 양측은 자치행정기구 집강소 설치와 폐정 개혁안에 대해 논의했으며, 폐정 개혁안을 실시하는 대신 농민군의 자진 해산에 합의했다. 전봉준과 농민군은 53개 고을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을 추진했다.
민 씨 정권은 농민군과 집강소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몰래 토벌 계획을 세우며 청국에 군대 요청을 했다. 청국은 군함과 군대를 파견했고, 일본은 조선 출병을 통지했다. 일본은 텐진조약을 근거로 군대를 파견하며, 공사관과 거류민 보호를 주장했다. 이로 인해 양국 간의 전쟁이 발발했고, 전투는 아산만 해상, 충청도 성환, 평양 등지에서 계속되었다.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고, 일본은 조선 내정에 본격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했다.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사로잡는 무례한 행동을 했으며, 친일개화파 김홍집 내각을 내세워 개혁을 추진하고 조선 병탄을 시도했다.
그 해, 국운이 위태로웠던 해월은 충북 옥천 청산현 한곡리에 있었다. 이 마을은 ‘문바위 골’이라고 불리는 바위가 있는 곳으로, 북쪽은 충북 보은, 남쪽은 영동, 동쪽은 경북 상주와 통하는 지리적 요충지였다.
해월은 한 해전 보은 취회를 상주 왕실에서 지도했으나, 왕실의 눈길을 피해 7월 말에 돌아온 후 대접주 조재벽의 추천으로 문바위 골로 옮겼다. 그곳에서 해월은 도인 김성원의 집에 거처하게 되었다. 김성원은 문바위에 이름이 새겨진 농민군 지도자였다. 후일 관군이 이 집을 수색하며 불을 질렀고, 감나무 그루터기만 남았다.
해월은 문바위로 옮긴 지 두 달 만에 열아홉 살 아들 덕기(다른 이름 부품)를 잃었다. 아들은 부친의 피신 여정을 따라가다가 지병에 걸려 사망했다. 해월은 자식의 죽음에 대한 비통함으로 한동안 음식도 입에 대지 못했다.
△농민군의 해산과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전주화약 이후, 농민군은 해산되었고 각 고을에서는 집강소를 중심으로 폐정개혁에 전념하고 있었다. 이때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삼남에도 전해지자, 도인들 사이에서 일본 세력의 축출을 위한 기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호남 일대에서는 집강소를 중심으로 농민군들이 결집하고 있었으며, 청산 문바위골로 기포를 촉구하는 통문이 계속해서 도착했다. 이러한 통문은 연초 고부 봉기 이후 계속 오고 갔으나, 해월은 당시 도인들에게 자제를 요청해야만 했다.
△해월의 신중한 대응과 혁명 준비
해월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도인들의 기포 촉구에 대해 신중히 대처해야 한다고 고심했다. 1871년 영해거사 실패의 경험이 뼈저린 후회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신중한 결단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혁명은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일로, 많은 도인들의 희생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해월은 동향을 면밀히 파악하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느꼈다. 연초 고부 기포 때 해월은 전봉준의 난을 개인적 감정으로 인한 것이라 여겼고, 스승의 순도 이후 관의 지목을 피해가며 애써 이룬 동학교단이 한꺼번에 무너질까 걱정했다. 해월은 전쟁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고, 섣부른 무장봉기는 용납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상황은 이전과 크게 달라졌다. 왜적이 궁궐을 침범하고 내정을 간섭하며, 관군은 도인들을 색출하고 살육까지 자행하고 있었다. 국가와 동학 조직의 존립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해월은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도인 오지영을 호남으로 보내 현지 상황을 확인하도록 했다. 오지영의 보고를 받은 해월은 대도소에 상황을 보고하고, 접주들은 외세 침략에 대응하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결의를 했다.
해월은 이에 따라 기포령(총동원령)을 발령하고, 농민군을 청산 문바위 골로 집결시켰다. 의암 손병희를 통령으로 임명하고, 전봉준을 출정 준비 중인 논산으로 급파했다. 동학농민혁명은 보국안민, 광제창생에 이어 ‘척왜양창의’로 그 목표를 확장해 나가는 순간이었다.
김상조 역사문화답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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