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박정희가 산자를 압도한다고 하는 <박정희 신드롬>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영웅의 죽음은 글로 눈으로 읽어 본다. 아무리 그 죽음이 하도 애석하여 성난 머리칼이 관을 찌르고 하늘을 찌른다 해도 영웅은 천명이 아닌 죽음에 이르지 않으면 범상치 않던 그 강골한의 상징성과 현실성은 반감되어 어울리지 않는다.
영광과 찬사에 넘친 영웅에는 비극적인 최후가 꼭 필요하다. 그것은 장렬한 전사든 씩씩하고 굳센 죽음, 의를 지킨 죽음, 뜻밖의 닥친 재앙과 액운의 죽음이든 간에 영웅은 아쉬운 죽음으로 애석하고 통절하며 안타까운 최후를 마감하지 않으면 영웅으로서의 흠모와 추앙은 빛이 바래 그 효과가 무산된다.
영웅의 말년이란 것이 뼈만 앙상하게 남아 핼쑥하고 파리하게 노쇠한 몰골로 천수를 누린다면 그것은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불쌍하여 언짢아 견딜 수 없는 고통일 뿐이다. 비극적인 죽음이기는 하나 인도환생(引導還生)하여 새롭게 되살아나기 위해서는 역시 죽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영웅은 운명적으로 구들목 죽음을 거부한다.
영웅은 비극적인 죽음에 의해서만 또 하나의 이순신의 거북선이 되고 허준의 ‘동의보감’이 될 수 있듯이 그 풍기는 특유의 느낌과 영특한 기백이 솟아나는 생전의 영광이 한층 더 아름답게 투영되고, 빛이 찬연하게 발산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파멸, 고뇌, 비참한 죽음을 보고 애석해하는 사람은 그 영웅의 찬란한 업적을 한층 강하게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어, 마음속 깊이 각인되고 부조되어 새로운 흠모의 정이 쌓여 성취의욕의 발심(發心)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므로 슬프고 안타까운 죽음이 계기가 되어 현실사회와 대비(對比) 비유하는 생각에 이른다.
이 마음 내킴의 계기가 사건의 효모로서 모든 역사상의 사실을 연면 계승시키는 원동력으로서 끊어지지가 않는다.
한번 지나간 역사는 절대로 되돌릴 수도, 바로 세울 수도 없으며, 일단 사회에 제기된 역사사실은 반드시 시종의 인과가 있어 상관 결부되어 그 전도(傳導)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사실관계가 현대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어떻게 이어져 왔으며 또 어떤 의의를 지니고 있는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영도자는 국가 장래의 방향 설정에 있어, 평소 느꼈던 사상과 집념의 비전 확립에다 현재의 실제적 상황 파악과 사계(斯界) 권위자의 의견을 종합하여 수립된 정책에는 온 몸을 던지는 헌신적 현장주의로 물꼬를 틀면, 본류는 물길을 잡게 마련이다. 진창에 빠진 우리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 마침내 ‘우리도 할 수 있다’고 자각하게 만들었다. 그러기에 영도자가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민족은 망한다고 경고 했든가. 그런 뜻으로 본다면 오늘의 한국은 어제의 뿌리에서 찾아야 되고 <새마을 운동>의 창시자, <새마을 노래>의 작사, 작곡을 한 박정희 정치철학은 마침내 세계 공산주의 국가 몰락에 원인(遠因)을 제공했고, 등소평의 흑묘백묘의 이론제기의 정당성이나, 그가 <인민공사>를 스스로 해체하고, <새마을 운동>을 배우라고 재촉한 것은 그의 사실 파악의 직관성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알 수 있다.
한때 중국지도자가 한국, 홍콩, 싱가포르 수준에 이르지 않으면 정치 체제를 변경하지 않겠다는 말이나, 오늘의 동남아의 번영 등도 이 철학을 교본으로 삼았고, 개도국 및 후진국 관리들이 앞 다투어 그 철학을 배우려 혈안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뿐인가 “하면 된다” 그리고 “도전 앞에 불가능은 없다”는 현실정시의 굳은 결의와 집념을 실천으로 불사른 당찬 정혼에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와 먼동이 트면 어둠이 걷히듯, 이제 보릿고개가 청동기 시대 얘기처럼 요원하게 들린다.<계속> 이준걸 前 국사편찬위원회 사서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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