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성 탈환
왜군에 점령당한 경주성을 박진은 경상좌도의 병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경주에 이르러 야밤을 이용하여 성 밑에 매복하여 비격의 진천뢰를 발사하였다. 당시 진천뢰는 현재의 포탄으로 이때 동양에서는 조선군이 최초로 사용한 문명의 무기였다.
이 전투에서 포탄이 성 중에 투하되니 왜군은 무엇인지 모르고 포탄을 모아 돌려보고 있을 때, 포탄의 작렬한 폭발에 파편은 별과 같이 파열되어 일시에 30여 명이 죽고, 그 외 많은 병사가 중상을 입고서야 경악을 금치 못하고, 낙심천만에 모든 것 체념하고 다음 날 먼동이 트기 전에 성을 버리고 울산으로 퇴각하였다. 그러자 박진은 1592년 9월 7일 드디어 경주성을 수복 입성하였다.
진천뢰는 화포장 이장손이 1591년에 발명했고, 화약·철편·뇌관으로 이루어진 포탄(지름21cm, 무게17~8kg, 사정거리 500~600보)으로 박진이 사용했으며, 경주 판관 박의장을 선봉에 세워 탈환했다.
박진은 전 밀양부사로 있을 때 5백의 군사를 거느리고 밀양에서 고니시 부대와 싸운 전력이 있으며, 조정에서 경주성의 전 병사 이각이 성을 버리고 도망갔으니 그 후임에 박진을 경상좌병사로 임명하고, 경주성의 수복을 명했다.
이 무렵에 경주성에 왜군이 충만하고, 인심이 동요됐다. 박진의 병사들은 능히 적에 대항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흩어진 백성들이 모이고, 산중에 숨어 있던 수령이나 아전들도 내려 와 내막을 알아보고 비로서 조정과의 관련이 있음을 알고 권응수의 영천 탈환 소식도 알게 되어 힘을 보탰다. 그리고 여기에다 영토와 백성들이 왜군에 의해 유린당하는 현상을 목도한 민초들은 적개심이 왈칵 쏟아져 쌍심지를 켜고 서둘러 의병 대열에 합류했다. 그리고 심장을 저격당한 이 불의를 징악코자 원한의 대갚음을 뇌리에 치부(置簿)해 둔다.
산산이 흩어진 무력감에 분통의 울림이 퍼져 급기야 안방에 눌러 앉은 날강도를 물리치기 위해 ‘힘을 합하자’는 의분이 용솟음 쳐 민중의 분기를 자아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박진의 경주 수복의 소식을 많은 국민들이 전해 듣고 임진왜란의 판도를 뒤집어 놓았다. 이로 인해 각 도의 의병들이 의기충천하여 일시에 붕기하였다.
경주 탈환 40일 전에 영천성의 수복이 있었다. 권응수는 영천의 훈련 부봉사로 간담이 크고, 용감해서 정대임과 같이 의병 천여 명을 거느리고 영천성의 왜병을 포위 해 앞장에서 공격했다. 이를 본 조선군 사졸들과 의병들은 앞 다투어 성벽을 넘어 들어가 왜군을 사정없이 무찌르니 창고에 숨고, 명원루에 오르기도 하여 불을 붙여 공격하니, 모두가 화염에 타 죽었다. 그 냄새가 수 십리 밖에까지 풍겼다고 일본 측 기록이 전한다.
이 전투에서 왜군 수십 명은 그들 진영에서 탈영하여 경주로 숨어 들고, 연달아 수십 명씩 때를 지어 의성·군위·안동 등에 투항 해, 이들로 인해 경상도 지역의 수복 작전에 큰 힘이 되었다.
의병분기
임진왜란 초기 관군은 밀려 오는 왜적에게 단 한 번의 저항도 못하고 도망만 쳤다. 그야말로 백전백패다. 그러나 의병과 의승병은 전국 곳곳에서 적의 진격을 차단하고 보급로를 끊고, 기습작전을 감행하는 등 전후방을 교란 시켰을 뿐만 아니라 전방에서는 전투를 피해 청야작전(비워 굶주리게 함)을 썼다. 결과적으로 조정은 약했으나 민중은 강했다. 그리고 관군은 약했으나 의병은 강했다. 이것이 바로 민족의 저력이다.(당시 의병수 2만 6백명)
이 당시 조선의 의병장으로 곽재우·고경명·정인홍·최경회·김면·김천일·조헌·정문부·휴정(서산대사)·유정 등의 활약이 눈부시며, 특히 경상도 현풍의 곽재우군이 왜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진주성을 포위한 왜군을 공격했으며 또한 전라도의 침입을 저지했다. 충청·전라·경상도의 의병은 왜군의 병참선 내지는 보급선을 차단하였다. 평안도 지방은 서산대사가 이끄는 천 수백 명의 승병은 고니시군의 평안도 이북의 침입을 철통같이 막고, 함경도 남부의 의병은 나베시마 부대를 공격하여 반신불수로 만들었다. 그리고 함경도에서 정문부·최배천 등의 의병은 가토오의 침략군을 함경도에서 몰아내고, 특히 12월에는 길주성의 왜군은 전멸에 가까운 큰 피해를 당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당한 임진년의 왜란은 순식간에 조선강토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20일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겼으니 얼마나 일방적이고, 위태로우며 절망적인 난리였겠는가. 나라가 위기인 만큼 민심은 흉흉했다. 진창에 코를 박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참혹한 난리 속에서 삶에 연연치 않고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이 많았다.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 ‘누르면 튕기는 저항심’이 농민들과 선비, 유림 및 승려들의 공분을 쌓아 그 영혼들이 들판의 불꽃처럼 퍼져나갔다. 조선 왕조 5백년의 멍에를 벗어 던진 그 의기는 장했다. 그리고 용맹스럽고 신념도 있었다. 민중의 가슴 속에 잠재 해있던 민족의 혼을 일깨운 철학도 있었다.
이와 같이 군사적 승리에 도취된 왜군은 1593년 평양의 패전으로 퇴각 해 3월 20일 서울 근교인 소사에 집결해 5개 방면군의 인원점검을 3봉행이 실시했다. 이 중 고니시 부대 정원 1만 8천 7백명에 남은 자 6,626명(전사율 64.56%), 가토오 부대 1만명에 남은 자 5,492명(전사율 45,08%) 오토모 부대 6천명에 생존자 2,512명(전사율 58.13%)에 이르렀다. 그 외 왜장들은 병에 걸렸고, 또 탈진상태라고 기술했다.
일본의 식자층에서 임진년 조선 침략 전쟁을 가르켜 낭비의 해외 유학이라고 빈정되기도 하고, 무용(無用)의 전쟁, 무명(無名)의 사(師)라고 악평을 했으며 가이바라 에키겐 같은 학자는 도요토미의 조선 침략을 가르켜 탐내는 사람과 교만한 사람, 화내는 세 사람의 합주라는 탐·교·분(忿)의 3병(兵)을 합한 경거망동의 짓이라고 혹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보상으로 문화상으로는 활판 인쇄와 서적의 약탈이 있었고, 공예상으로 도자기와 도공들의 포로 납치, 그리고 외교상으로는 명군과의 접촉이라고 볼 수 있다.
이상을 좀 더 뒷받침 하는 글에 도쿠토미 소호의 『조선역(役)』에 “도요토미의 조선 침략의 총결산으로 발안자인 도요토미는 그의 후손에게 화를 입혔으며 오늘날까지 그 화가 남아있다”. 도륙의 실상과 그 인과의 사회적 상실감은 잊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이미 저지른 패악질은 돌이킬 수 없는 죄악으로 남아 그 범죄는 자손을 넘어 국가적 연좌의 멍에를 매는 것이 마땅하다.
일제가 1910년 조선을 지배할 때 가장 곤란한 것은 조선 사람들이 임진왜란을 모두 알고 있었고, 역사적 사실을 덮으려 해도 불가능했다고 한다. 史實不可蔽(사실불가폐) 역사는 어제의 일이지만 오늘을 가르치고 내일을 비춘다. <끝> 이준걸 前 국사편찬위원회 사서실장
저작권자 © 경북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북도민일보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디지털 뉴스콘텐츠 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
▶ 디지털 뉴스콘텐츠 이용규칙 보기
▶ 디지털 뉴스콘텐츠 이용규칙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