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도민일보] 사람이 사람을 치유할 수 없을 때 자연을 찾게 된다. 사람이 자연에서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연은 우리를 품고 치유한다. 아름다운 풍광을 둘러싼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도시생활에 지친 육체와 정신이 여유를 찾기에 충분하다. 그렇지만 걷는 동안 내밀한 생각과 감정이 머리를 복잡하게 한다면, 심신이 느슨해진 틈으로 침전된 잡념이 머릿속으로 기어 나온다면 평온을 망치기일수다. 이러한 빈틈마저 풍광으로 채워 물아일체(物我一體) 경지로 빠져들게 하는 곳이 있다.
육지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 그 경계를 따라 데크로드와 너덜길을 걷다보면 바다 한가운데 서서 육지를 바라볼 수 있다. 바로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이다. 이곳에 둘레길이 열리기 전에는 포항 사람들조차 비경의 존재를 모른 채 살아 왔다. 바다를 삶터로 여겨온 이곳 몇몇 어부만 고된 노동의 대가로 경치를 감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곳곳의 비경은 원시자연 그대로 보존되어있다.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은 청림운동장에서 시작해 도구해변을 지나 호미곶까지 총 25㎞로 되어있다. 주말을 이용해 하루를 여유 있게 보내기 딱 좋은 코스다.
△ 해송 숲길 따라 걷다보면 어느덧 이야기 속
연오랑세오녀길은 일월동 713번지 청림운동장에서 시작해 연오랑세오녀테마파크까지 되어 있는 1코스다.
청림은 마을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소나무가 많은 곳이다. 이곳 바닷가 소나무는 대부분 해송이다. 땅에 모래가 많이 섞여 있고 소금기 많은 바닷바람에도 생존력이 좋아 방풍효과도 뛰어나기 때문이다. 포항은 해병대 1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해병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운 좋게 해병대상륙훈련장을 지나다보면 말로만 듣던 귀신 잡는 해병을 만날 수도 있다. 포스코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도구해수욕장에서 시작된 백사장은 포항의 자랑거리였다. 햇볕을 받으면 금빛으로 보인다고 해서 금모래라 하였다. 또 그 길이가 십리나 되어 동해안 일대에서 가장 길고 아름다운 백사장으로 알려지면서 명사십리로 불리던 곳이었다. 여름에 물놀이 하다가 지치면 송림에서 더위를 피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해수욕장이다. 임곡마을에 들어서자 길게 늘어선 방파제 사이로 어촌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바닷바람에 실려 온다. 멀리 바닷가 나지막한 산 아래 전형적인 어촌의 집들이 소복이 모여 있다. 옹기종기 모인 집사이로 빨간색 슬레이트 지붕이 손님맞이하듯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온다.
삼국유사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해와 달을 소재로 한 연오랑세오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 이야기의 고장이 바로 포항이다. 임곡마을이 끝나는 언덕에는 연오랑세오녀테마파크가 바다를 내려다보며 웅장한 자태로 서 있다. 두 남녀가 일본으로 건너가자 신라의 해와 달도 함께 건너가 버렸다. 세오녀의 비단으로 제사를 지내니 신라의 해와 달이 다시 정기를 찾았다는 이야기다. 연오랑세오녀테마파크는 세오녀의 비단을 보관 했다는 귀비고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놓은 곳이다. 대장간 체험도 할 수 있어 가족과 함께한다면 더 의미 있는 추억을 만들 수 있다. 이층 한옥정자에 오르자 시간이 멈춘 듯 바다가 고요하다. 먼 바다를 지나는 한 점 고깃배는 하늘에 날아가는 은빛 작은 비행기를 보는 듯하다. 가져온 근심걱정이 있다면 다 털어놓고 가기에 좋은 곳이다.
△ 호랑이꼬리가 감춰둔 원시자연의 비경
선바우길은 연오랑세오녀테마파크를 지나 동해면 입암리 359번지 입암마을에서 시작해 흥환해수욕장까지 이어진 2코스다.
입암(入岩)은 한자 그대로 바위가 서있다고 해서 마을이름으로 붙여진 곳이다. 순 우리말로 표현하면 선바우가 된다. 선바우는 흔히 육지에서 볼 수 있는 화강암으로 된 바위와는 다르다. 크고 작은 돌멩이와 모래가 뒤섞여 만들어진 것으로 화산활동 때 엄청난 압력을 받아 암석으로 변한 것이다. 수 만년에 걸쳐 바닷물에 씻기고 바람에 깎여 지금과 같은 형태가 만들어 졌다. 선바우는 6미터 거대한 모래덩이가 바다를 향해 벌떡 일어선 것 같아 그 형상에서 자연의 불가사의를 느끼하게 한다. 선바우 옆에 또 하나의 거대한 바위가 우뚝 솟아 있다. 생김새가 남성을 닮았다 하여 남근바위다. 나무 한 그루 없는 언덕배기에 이름 모를 풀이 가득 자라고 있다. 안내판에 해국군락지라 되어있다. 7월에서 11월 이곳을 찾는다면 활짝 핀 해국을 만날 수 있다.
선바우를 지나 하선대로 가는 흰 바위절벽은 오랜 세월 바닷물에 움푹 패여 해저동굴을 걷는 느낌이다. 이 곳 사람들은 이 바위절벽을 힌디기라 부른다. 흰 바위절벽 언저리로 시선을 돌리면 여러 곳에 크고 작은 구멍이 나타난다. 구멍마다 납작한 돌멩이가 소복이 쌓인 것으로 봐서 소원을 빌었던 흔적임을 알 수 있다. 돌멩이로 동전을 대신 할 수 있는 재미난 장소다.
힌디기가 끝나는 지점에 잠시 쉬어가도 좋을 작고 한적한 백사장이 나온다. 어릴 적 물제비 던지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곳이다. 힌디기를 지나 먹바우로 들어서자 주변 바위색이 온통 검정색이다. 작은 백사장을 사이에 두고 바위 성질과 색상이 극명하게 대비를 이룬다. 군데군데 풀이자란 검정바위 언덕으로 힘겹게 모감주나무 몇 그루가 나지막이 서있다. 7월에 꽃피우는 모감주나무는 주로 바닷가에 서식하고 씨앗은 염주에 사용한다고 해서 염주나무라고도 한다. 바로 이 마을일대가 모감주나무 군락지역이다.
선녀이야기는 흔히 산골짜기 폭포와 관련되어 지는데 이곳에선 갯바위와 얽혀 전해진다. 입암리와 마산리 사이 황옥포(黃玉浦)에는 작은 바위섬이 있다. 바로 하선대다. 선녀를 사랑한 용왕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장소다. 이 바위를 마을사람들은 하잇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산마을로 가기위해 백사장으로 발길을 돌리자 가장자리에 우뚝 선 검정색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먹바우, 바로 검둥바위다. 연오랑세오녀가 이 바위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는데 믿기지 않는다. 마산마을 해안은 물이 맑아 바다생물이 움직이는 모습까지 훤히 들려다 볼 수 있다. 낚시를 좋아 한다면 이곳 방파제에서 강태공이 되어도 좋다.
△ 몽글몽글 갯바위부터 자연이 만든 위대한 예술작품까지
널찍한 돌을 깔아 놓은 너덜길을 잠시 걷다보면 해안을 따라 연결된 절경들이 다시 나타난다.
바닷가 갯바위가 예사롭지 않은 자태로 서있다. 비문바위다. 검정색 바위에 글자를 새겨 넣은 것 같이 가로세로 문양이 선명하다. 생김새가 영험해 보여서 일까 비문바위 머리위에 손바닥만 한 돌멩이가 수북이 쌓여있다. 그 모습이 바위에 모자를 쉬워 놓은 것 같다. 듬성듬성 자리하고 있는 갯바위들은 하나같이 동해안에 살고 있는 생물을 닮아 있다. 동해의 파도가 수 만년에 걸쳐 공들여 깎았으니 당연한 이치다. 물가에 나와 바다 쪽으로 지긋이 바라보는 것이 있다. 유심히 보니 그 생김새가 영락없이 물개를 닮았다. 데크로드 아래 평평한 돌바닥으로 맑은 바닷물이 파도의 리듬에 맞춰 들락날락한다. 이곳은 마치 거대한 조각공원을 연상시킨다. 흰 암석 벽을 비스듬히 기대고 앉은 여인상이 눈을 번쩍 뜨게 한다. 하체는 바다에 담그고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어딘가를 지긋이 바라보는 형상이다. 인어공주라 불러도 좋을 이것을 여기 사람들은 미인바위라 부른다. 자연이 가장 위대한 예술가라는 사실을 또 한 번 느끼게 하는 순간이다. 모퉁이를 돌아가자 크고 작은 바위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인간의 모습처럼 온갖 형상을 하고 있어 군상바위라 부르는 곳이다. 그야말로 남녀노소가 다 모여 있는 것 같다. 바다를 향해 우두커니 바라보는 신랑각시바위는 이스트 섬의 모아이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돌하르방 같기도 하다.
해변 너덜길을 따라 걷다보니 한적한 어촌마을이 나온다. 아담한 항구의 등대가 마을길로 인도한다. 대부분의 어촌마을이 그러하듯 이 마을에도 젊은 사람만나기 힘들다. 항구는 언제 출항할지 모를 고깃배 몇 척과 바닥에 깔아놓은 거물이 느릿느릿 다가오는 할머니 손길을 기다린다. 마을을 지나 너덜길을 한참 걷다보면 거대한 언덕을 횡으로 갈라놓은 바위절벽이 춤을 추듯 너울너울 시선을 유혹한다. 먼 바다 화물선과 속도를 맞춰가며 백사장을 걷다보면 문득 가장자리에서 내려다보는 큰 바위를 만나게 된다. 바다를 향해 근엄한 자세로 마을을 지키고 있는 장군바위다.
동해안에는 용과 관련된 이야기가 곳곳에 서려 있다. 동해의 힘차고 거센 환경이 용의 기상과 많이 닮아서 일 것이다. 대동배마을에는 고려 충렬왕 때부터 전해지는 아홉 마리 용이 살다가 승천했다는 구룡소가 있다. 용이 놀았다는 소(沼)에 바닷물이차면 햇빛에 반사되어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인다. 구룡소는 이 마을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장소다.
△ 여정의 끝에서 만나는 상생의 손
호미길은 호미곶면 구만리 산39에서 시작해 호미곶 관광지까지 이어진 4코스다.
구만마을은 한반도 지형에서 호랑이꼬리 끝부분이다. 독수리바위가 있는 곳이다. 오랜 기간 파도와 바람이 깎아 만든 독수리바위는 살아 움직이듯 생동감이 넘친다. 파도가 심할 때면 고기가 이곳으로 밀려나와 까꾸리로 끌었다고 하여 까꾸리개라 부른다.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일출을 배경으로 독수리바위를 찍기 위해 많이 찾아오는 곳이다. 구만은 바람이 많은 곳이다. 넓은 청보리밭에 바람이 불면 마치 바다가 출렁이는 모습과 닮았다. 한흑구의 첫 수필인 보리도 구만의 보리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또 이육사의 청포도시비도 이곳에 있다. 이육사는 안동에서 태어났지만 오랜 감옥생활 로 얻은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동해면 도구리에서 요양하는 동안 1939년 문장지에 청포도를 발표했다. 청포도는 포항에서 쓴 이육사의 대표작이다.
국립등대박물관은 4코스의 마지막 지점인 호미곶광장 바로 옆에 있다. 우리나라에서 하나뿐인 등대박물관으로 등대의 역사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는 곳이다. 1985년 처음 문을 열었고, 높이26.4m 유인등대는 지방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되어 있다. 호미곶광장은 그야말로 확 터인 바다 경치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모든 여정을 풀고 새천년기념관도 둘러보고, 출출한 허기도 해결할 수 있다. 특히 상생의 손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어도 좋은 추억이 될 수 있다.
여기까지 호미반도해안둘레길은 끝나고 다시 호미곶 광장부터는 구룡포항에서 양포항을 거쳐 장기 두원리까지 33㎞를 잇는 해파랑길로 연결된다.
김용진 작가
경북문인협회 회원, 디자인학 박사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 전문대학원 겸임교수
지역문화콘텐츠디자인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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