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언관(言官) 및 사관(史官) ②
  • 경북도민일보
조선의 언관(言官) 및 사관(史官) ②
  • 경북도민일보
  • 승인 2024.10.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사와 별도로 예문관에는 사관(史官)을 둘 두어, 지방에서 올라오는 장계나 왕이 내린 칙령과 교서는 반드시 사관을 거쳐 이를 초록한 다음, 육조 · 대간(사헌부·사간원 직원)에게 넘겨주도록 하였다. 예문관 직원을 임명할 때 특히 엄격히 선별하였다. 이들 사관은 언관과 더불어 왕조시대 최고의 정책을 다뤘던 조정에서 벌이는 의논 및 집행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임금의 정무에 관한 행동에는 반드시 사관 두 사람을 좌우로 입시케 하여 현장에서 직접 임금의 말을 받아쓰게 하였다. 여기에서 기록되는 문서와 기타 시정기(時政記)가 사초(史草·사관이 기록한 초고)가 되어 훗날 ‘실록’의 바탕자료가 된다. 사관을 일명 필주(筆誅)라 하여 ‘붓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뜻이다. 이렇게 사관은 서슬이 시퍼렇게 기세가 등등했다.

사관의 기록이 얼마나 철저한 지 하루는 경연장에서 임금이 방귀를 뀠다. 좌우에 있던 사관을 보고, 임금의 방귀 건은 기록하지 말라고 타이른다. 그런데 사관은 임금의 방귀 이야기에다, 적지 말라는 말까지 기록했다. 차라리 방귀를 뀌놓고, 여러 신료들이여 웃지 말라, 이것은 항문의 생리적 자연의 하품이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조선 3대 임금인 태종은 사냥에 나가 말을 달려 노루를 잡다가, 말에서 떨어졌으나, 다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고 사관에게 “이 일을 알리지 말라”했다. 그렇지만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들은 알리지 말라는 말까지 죄다 받아 적었다.

조선시대 518년 동안 임금이 참석하는 모임에는 반드시 사관이 입회하여 임금의 언동을 낱낱이 기록하였다. 그 덕분에 당시 벌어졌던 일들을 알 수 있게 되었고, 강력한 권력을 가진 임금도 사필(史筆) 앞에는 스스로 몸가짐을 조심하려 했다. 500년에 걸친 역사기록이 오늘날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되고, 국보(제151호)인 ‘조선왕조실록’으로 남아있다. 이 실록을 쌓아 올리면 15층 아파트 높이(35m)가 되고, 수량은 1893권 888책이 된다.

중국의 고대부터 한무제까지 3,000여 년간의 통사를 불알이 잘리는 형벌(궁형)을 받는 치욕을 무릅쓰고, 16년간이나 집필에 몰두하여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의 사관으로서의 사명감과 더불어 또한 다른 사건의 목숨 걸고 권력 앞에 ‘아세곡필’을 끝내 거부한 3형제 사관의 유명한 고사가 전한다. 중국 전국시대 제나라의 최고 실권자 최서(崔抒)가, 원한 관계로 임금 장공(壯公)을 죽였다. 당시 사관이던 태사(太史)가 “최서가 장공을 시해하다”고 적었다. 실권자 최서가 그런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고 사관 태사를 죽였다. 태사의 동생이 형과 똑같이 기록했다. 실권자 최서가 또 아우 사관을 죽이자, 밑의 막내 사관이 또 다시 그대로 기록했다. 그제서야 2사 1생에서 기록의 말살을 포기하였다고, 역사상에 있는 사실은 가리어 막을 수 없다. (사실불가폐·史實不可蔽)란 깊은 뜻을 알게 되었다고 고사는 전한다.

임금이 있는 곳에서의 회의와 공식적 대화에는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사관은 꼭 참석을 해야 하고, 여기서 얻어지는 모든 기록은 사초로 사기(史記)의 초고가 된다. 그리고 시정에서 역사상 자료가 될 만한 것을 기록해 두는 시정기는 그 당시의 정사(政事)로, 현장에서 보고 들은 사실들의 기록 뭉치를 사초와 같이 기억의 곳간에 쌓아뒀다가 ‘실록’의 편찬 단계에서 묵은 과거를 꺼내, 먼지를 털고 기록 뭉치를 풀어헤쳐 사관의 혜안으로, 저마다의 의미를 찾아 진정성을 부여하고, 일어난 현상을 편년체로 재구성한다. 이때 여러 사초들을 대조 · 교감하고, 심층적 해석과 분석이 곁들여진다.

사관은 나라의 역사를 재설정할 때 마다 주관을 배제하고, 객관적 공정성을 부여하여, 나라의 지향성에 합리적 수단을 동원한다.

역사는 사실들에 기초한 ‘해석’의 학문이기 때문에 사실이라는 종교의 광신도처럼, 사관은 그 흔적을 찾아 본체에 접근하는 외곬이 있을 뿐 타협을 모른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뭉개고 덮고, 보탠다는 말이 범접을 못한다.

600여 년 전부터 내려오던 사관 및 언관 제도의 통치 기관의 기록물인 ‘조선왕조신록’을 남겼으며 여기에는 사관의 참석 없는 임금의 회의는 아예 ‘숙득공론’으로 치부되고, 원천적으로 공식 모임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이런 훌륭한 제도를 경험한 전통 있는 나라로써 만시지탄은 있으나,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니, 이 나라에 언로의 소통과 국민의 통합, 여야의 상호 협치 등 전체의 화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공식적 거동에는 반드시 국사편찬위원회 편사관이 입회하여 회의와 대화의 일사일언의 기록과 녹음 등을 남겨, 다음 정권 때 ‘통치실록’으로 편찬하여, 영원히 국가기록물로 보존 전승시켜, 일반 국민 누구나 열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치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한국의 보편타당성 있는 역사책을 편찬하여 국민의 균형 잡힌 역사 인식을 견지케 하는 책임을 지고 있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것 하나만 확실히 해도 정치는 절반 이상의 성공을 거둔다.

여기에 더하여 사실 붓 한 자루로 살아가는 호생사관(毫生史官)이 심지 굳게 촌철살인의 사명을 띠고 자리매김에 나선다면 아무리 독선과 오만한 권력이라도 여기에는 버티지 못하고, 공명정대한 사필입국(史筆立國)에 정필보국(正筆報國)의 결의와 충정에 감동되어 그 통치 이념의 순작용에 휩싸이기 마련이다.

그러자면 ‘국정은 인사가 만사다’라는 잠언을 철저히 믿고 조선시대 사관 정도의 권능만 부여한다면 나라 경영과 사회질서가 제자리를 찾아 정상적인 운영이 가능하리라 확신한다. 그럴 것이 사관의 눈에 한번 찍히면 여지없는 유취만년(遺臭萬年·누명이 만년에 끼침)의 나락으로 떨어져 그것이 자칫 패가망신에다 어찌 불똥이 잘못 튈까 두려워 상탁하부정(上濁下不淨 · 웃물이 흐리면 아랫말도 깨끗하지 못함)도 은연중에 웃물이 맑아지는 정화작용이 이루어져 점진적으로 청정국가로 튼실한 터전을 잡게 될 것으로 짐작된다.<끝>

이준걸 전 역사편찬위원회 사서실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기사
  • 경북 포항시 남구 중앙로 66-1번지 경북도민일보
  • 대표전화 : 054-283-8100
  • 팩스 : 054-283-5335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병희 부국장
  • 법인명 : 경북도민일보(주)
  • 제호 : 경북도민일보
  • 등록번호 : 경북 가 00003
  • 인터넷 등록번호 : 경북 아 00716
  • 등록일 : 2004-03-24
  • 발행일 : 2004-03-30
  • 발행인 : 박세환
  • 편집인 : 정상호
  • 대표이사 : 김찬수
  • 경북도민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북도민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HiDominNews@hidomin.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