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탄(高靈歎)의 음미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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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탄(高靈歎)의 음미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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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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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미당의 「고령탄」을 음미함에 앞서 여말의 유학자로 성균관 박사를 지낸 바 있고, 포은(정몽주)과 함께 삼은의 한 사람인 길재(야은)는 이태조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와서는 “신이 듣건대 여자에게는 두 남편이 없고, 신하에게는 두 임금이 있을 수 없다”고 하고는 고향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한다.

옛부터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살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 산다고 하여 선산을 인재의 보고로 쳤는데, 그 발단은 야은(길재)이 금오산에 채미정을 지어 박서생, 김숙자 등의 제자들을 가르치고부터였다. 훗날 선산학파로 불릴 만큼 번성하여 여기에서 동방 5현이 나오게 되어 이 흐름이 퇴계와 남명(조식)으로 대표되는 영남학파가 성장하게 되었다.

세조의 돌이킬 수 없는 패륜과 신숙주의 인륜도덕의 역행은 마침내 절의파의 분개심을 불러 일으켜, 자신들의 엄청난 희생을 무릎 쓰고 죽음으로 웅변한 사육신과 한편에서는 벼슬을 버리고 일생을 숨어서 폐인처럼 마친 생육신의 절의에 많은 사류(士類)들은 “선비는 국가의 원기이며 문명할 때에는 생용(笙鏞·아름다운 악기)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그의 임무이며, 국정이 문란할 때는 송백같은 절개를 지키는 것 또한 선비의 책임”이라고 높이 찬양하였다. ‘사육신’이란 이름을 붙인 사람은 생육신의 한사람인 남효온 이었다.

계유정란과 사육신의 도륙은 백성 모두가 경악했고, 그 상황이 벌어진데 온 나라가 진저리를 치며, 하늘도 울고 산천도 울었다. 이런 정황에 일반에 공통되는 도리를 따르지 않고 사리와 동떨어진 패착의 길을 택했다.

신숙주는 세종대왕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고, 그 명석한 두뇌, 똑똑한 재주에 어이타가 의리를 배신한 돌이킬 수 없는 나락의 길을 택했던가. 왜 ‘인륜 도덕상 그래서는 안된다’고 말 한마디 못했던가. 다정한 벗님들을 다 먼저 보내놓고 이제와 참회한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한 사람의 패륜으로 수백 명의 기라성 같은 목숨을 앗아간 불의의 참극을 말리기는커녕 앞장서 부추기는 몹쓸 면면을 살펴보자. 정인지, 한명회, 정창손, 신숙주, 등은 단종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 마침내 금성대군을 사사하고 단종을 목매어 죽게 했다(이홍직 『국사사전』 660p).

이네들은 인간이기를 거부한 패륜에다, 불의의 행세로 우리들 가슴 저 안쪽까지 멍들게 하고, 숯덩이 같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도 무서움과 두려움에 말문을 열 수가 없었던 분위기에서, 목숨 건 선비들이 패륜의 밑동을 꺾으려 나섰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요절나고 말았다. 그러나 분기충천한 정의감은 후세에까지 깨어 있으라는 경종으로 안다. 그리고 사육신 정신이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 펴져 살아 꿈틀댄다. 여기에 하나 더 보태면 「몽유도원도」는 안평 대군의 꿈에 본 선경을 안견에게 그리게 했다. 수많은 골짝과 산봉우리의 구름 같은 복숭아꽃이 만발해 신묘의 경지에 달했다. 그림의 화찬과 시문이 훗날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란의 화근이 되어 사육신 등의 참살, 사약을 받았다. 안평대군의 발문과 명현 21인의 찬시로 두 개의 두루마리 총11.2m(그림1m)에 달한다. 안견은 안평대군의 벼루를 훔쳤다가 들켜 의절(義絶)을 당했음을 수양대군에게 탄원하여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다고 전한다.

계유정란이란 초미의 관심사로 비등한 여론과 쌓인 원성의 뭇매는 동생 신말주를 그냥 두지 않았다. 그는 호를 귀래정(歸來亭)이라 하고 1454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대사간에 이르렀다. 형의 무소불위로 인륜에 어그러진 몹쓸 짓을 하는 것을 보고 말렸으나, 선왕에 대한 배은망덕과 붕우의 믿음과 신의를 저버림에 멈추지를 않자, 벼슬을 버리고 순창에 내려가 귀래정을 지어 자연을 즐기며 욕심을 털고, 명예나 이익을 멀리하는 은자적 생활로 생을 영위하다 결국 전주부윤으로 임명되어 임기를 마쳤다.

고령부원군에 봉해진 신숙주에 대한 「고령탄」은 오언절구로 읊은 것이다. 세밀한 심리 분석과 행동거지를 통해 인간의 내면세계와 그 영혼까지 위로하고, 가해자를 응징하며 불의를 고발하는 탄식조 운율은 문장의 중장함과 깊은 맛의 함축성, 진솔하고 재치 있는 어휘 표현의 구사는 명미당 만의 학문세계에 감탄의 심연으로 함몰시킨다. 그리고 여기에다 구절마다 뼈가 있고 익살스럽게 비꼬면서도 품위 있는 영롱한 시어의 악부(樂府) 본문을 역하여 대충 윤색해보면 다음과 같다.

인생이 끝내 여기 그치고 마는가? 여기에 이르는 것도 크게 어려운 일이다.

은혜를 입어 부원군에 봉해지고 벼슬은 높이 대광보국(大匡輔國·품계의 최고관) 영의정이 되었도다.

자손 수십 명은 한결같이 조정에 올랐으며, 집은 제일요지에 하사받고, 그의 사호(賜號)는 보한재라 일컬었다. 신선이 따로 있는 문 앞에는 창잡이들이 줄을 섰고, 후당(後堂)에는 거문고 퉁소 소리가 그칠 날이 없으며, 발걸음은 천상에서 걷는 것 같고, 침을 뱉으면 만백성의 머리 위에 떨어진다. 공덕은 백성을 덮고 문장은 오랑캐에 빛난다.

고대 광실 높은 집에 네모에 풍결 달고, 집안에는 계집종이 바쁜 걸음으로 설치고, 약탕관에는 탕약을 달이는 찬모는 다급하게 연신 부채질만 해댄다.

다섯 왕조에 여덟 성씨의 열한명의 임금(五朝, 八姓 十一君)을 섬겼다는 풍도는 아첨의 대명사이기는 해도, 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가 세워질 때까지 53년 동안 권세를 누렸는데, 이제 겨우 여섯 왕 밑에서 기껏 37년을 보냈으니 아쉽기 그지없다.

하루 아침에 병이 드니 시의는 어약을 가져오고, 승지와 내시들은 베겟머리에서 어명을 전한다. 상공(相公·신숙주)의 병이 어떠하며 역질과 학질같이 심하지는 않은지, 또 상공의 병이 어떠한지 성주(聖主)께서 몹시 걱정하고 계십니다. <계속>

이준걸 전 역사편찬위원회 사서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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