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가족이 제언하는 보훈정책에 대한 小考
  • 경북도민일보
보훈가족이 제언하는 보훈정책에 대한 小考
  • 경북도민일보
  • 승인 2024.06.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특별 기고
존경하옵는 보훈부 장관님께 드립니다(1)

6.25 전쟁 발발 74주년을 맞이해 장영길 동국대 명예교수의 보훈 유가족으로 보훈정책의 중요성에 대해 기고를 연재합니다. 대한민국의 보훈정책은 국가유공자와 그 가족들을 지원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지만, 예산 부족, 복잡한 행정 절차, 의료 서비스 접근성 문제 등의 한계가 존재합니다. 보훈정책이 현재와 미래 세대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훈가족을 위해 우리는 감사와 존경을 표현하고, 지원 프로그램 참여, 정책 개선 촉구, 사회적 인식 제고, 기부와 후원, 정서적 지원을 통해 그들의 생활을 돕고 권리를 옹호해야 합니다./편집자 주



저는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장영길입니다. 그리고 6.25전몰군경유자녀 중에 제적 유자녀로서 부모를 모른 체 문중의 보살핌으로 겨우 고아의 신세를 면하여 오늘까지 신산한 삶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저의 보훈 번호는 26-087375이며, 호국영령 장이현의 자가 됩니다.

최근 보훈처가 보훈부로 승격되면서 보훈 정책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것으로 생각되어 불민한 제가 장관님께 몇 가지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흔히들 말하기를, 한 국가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전쟁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해낸 호국영령들을 제대로 모시는 보훈정책과 안보교육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나라를 잃고 나면 다음의 어떤 과정도, 예를 들면 납세의 의무도, 국방의 의무도, 경제발전의 기회도, 그리고 그렇게 부르짖던 민주화의 쟁취도 없기 때문입니다.

존경하옵는 장관님

대한민국이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허덕이고 있던 6.25 전쟁 당시, 적의 포화가 낙동강 지역까지 휩쓸고 지나갔던 그 시절에, 저의 아버님은 국가의 다급한 부름을 받고 열아홉 살 된 저의 삼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동생, 자네 형수 배 속에 있는 저 아이가 아들이거든, 저놈이 공부하고 싶다고 하면 공부나 좀 시켜 주게.”

이렇게 한 마디 남기고 구국의 성전에 뛰어드신 저의 아버님은 ㅇㅇ 전투에서 산화하신 후 유품 하나 남기지 않으신 채, 딸랑 전사통지서 한 장만 삼촌에게 남겨주었습니다. 그 후 안타깝고 그리운 세월이 흘러 위로 세 분 큰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야 작은아버님께서 저의 아버님의 제사를 모시게 했습니다. 그때 형수의 배 속에 있었던 그 아이가 이제 70이 넘은 백발이 되어 장관님 앞에 섰습니다.

존경하옵는 장관님

같은 유자녀 중에서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한 분이 있었습니다.

“제적 유자녀로 부모를 모르고 자란 사람이 어찌 박사가 되고 대학교수까지 되었냐?”고. 그래서 제가 어떻게 교수까지 되었는지를 잠깐 말씀드리면서 안보교육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강조하고자 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6.25전몰군경유자녀로서 전쟁고아입니다. 문중 어른들의 보살핌으로 겨우 유소년기를 보내기는 했지만, 생각하면 아찔한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중 어른들의 엄격한 훈육과 중등학교 선생님들의 안보교육 덕분으로 그나마 오늘이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다섯 살쯤 되었을 때, 문중 어른들에게 업혀 큰집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낯선 집에 버려진 저는 두렵고 불안하여 밤마다 몰래 소리 없이 울었습니다. 윗목 서늘한 곳에서 어렴풋이 잠들었다가 겨울밤 문풍지 우는 소리에도 깜짝 놀라 엄마를 그리워하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밤하늘에 아득히 날아가는 쌍발기의 구슬픈 여운 소리에도 까닭 없이 눈물이 흐르곤 했습니다.

큰집에는 사촌들이 아홉이 있었는데 둘이 어려서 죽고 일곱이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중 저보다 한 살 어린 사촌 녀석이 저를 몹시도 못살게 굴었습니다. 심심하면,


“야 임마, 너 왜 우리 집에 왔노. 너네 집에 가가라.”

걸핏하면 쥐어박고 코피 터지고, 그래서 요란한 저의 울음소리가 동네를 훑고 지나갔습니다. 버티다 못한 어느 날 마침내 가출 아닌 가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엄마를 찾아 큰집을 나선 것입니다.

존경하옵는 장관님

사람이 존재감이 없어지고, 소속감이 없어지고, 미래에 대한 꿈이 사라지는 순간에, 아마도 사람들은 인생을 포기하고 타락의 길을 가며, 심지어는 극단적인 선택의 길을 가기도 하나 봅니다. 저의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문중 어른들이 나섰습니다. 제사 때나 명절 때 음복 한잔하시면 하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너의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헌신하신 분이다. 항상 아버지의 뜻에 누가 되지 않도록 행동하고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와 보면, 방금 어른들의 말씀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현실을 실감했습니다. 어찌 공부라고 한답시고 책을 들고 앉아 있으면,

“어허, 저놈 봐라. 일하기 싫으니까 책 들고 앉았지.”

한 살 어린 사촌이 날벼락을 칩니다. 공부하는 것이 죄가 되어 이제 남 보는 데서는 공부조차 변변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남들이 잠든 새벽에 살그머니 일어나 호롱불을 켜고 배 깔고 누워 공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끔은 밖에 나가 서녘 하늘에 기울어 가는 은하수를 바라보며 이런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먼 훗날, 내가 죽어 하늘에 계신 아버님을 만나면, 결코 기가 죽지 않고 당당해야지.”

중학교 시절, 강종식 교장 선생님은 가끔 특별 수업을 통해, 6.25 전쟁이 왜 일어났으며, 그 전쟁의 수행과정이 어떠했으며, 전쟁 후의 결과가 어떠하였는지를 자세히 일러 주셨습니다. 나는 ‘호국영령의 아들답게 국방의 의무를 다하리라’ 이런 다짐을 두었습니다. 이 같은 안보교육 덕분으로 훗날 저는 면제된 국방의 의무를 자원하여 마쳤고 육군 상병으로 전역했습니다. 언젠가 제 아들놈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할아버지도 호국영령이시고 아버지도 외아들이시고 저도 외아들인데 제 군 면제는 어떻게 안 될까요?”

그때 저는 단호히 말했습니다.

“할아버지는 호국영령으로서 국방의 의무를 다하셨고 아빠도 면제된 국방의 의무를 자진하여 다하고 왔다. 너도 호국영령의 손자답게 명예롭게 군 복무를 마치고 오너라.”

아들은 조용히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장영길 동국대 명예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기사
  • 경북 포항시 남구 중앙로 66-1번지 경북도민일보
  • 대표전화 : 054-283-8100
  • 팩스 : 054-283-5335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병희 부국장
  • 법인명 : 경북도민일보(주)
  • 제호 : 경북도민일보
  • 등록번호 : 경북 가 00003
  • 인터넷 등록번호 : 경북 아 00716
  • 등록일 : 2004-03-24
  • 발행일 : 2004-03-30
  • 발행인 : 박세환
  • 편집인 : 김희동
  • 대표이사 : 김찬수
  • 경북도민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북도민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HiDominNews@hidomin.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