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북러 밀착 달갑지 않지만… 반미연대 포기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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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북러 밀착 달갑지 않지만… 반미연대 포기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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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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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9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4년 만에 다시 방북해 김정은과 ‘북러 포괄적 동반자 협정’을 체결, 체약국 중 한쪽이 침략당할 경우 상호 원조를 제공키로 합의했다. 이 협정은 ‘1961년 북소 우호협조 및 상호원조조약(조소 동맹조약)’의 부활로도 해석된다.

조소 동맹조약에는 ‘자동 군사개입 조항’이 포함돼 있었다. 북러는 ‘두만강 자동차 다리’ 건설에도 다시 합의했다. 새 다리가 건설되면, 중국이 동해로 빠져나갈 수 있는 두만강 하구 뱃길이 2중으로 막히게 된다. 북한은 최근 조선중앙TV의 해외 송출 위성을 중국에서 러시아로 바꿔버리기도 했다. 북한은 최근 일본과도 접촉했다. 냉전 종식 이후 줄곧 북한의 최대 후견국을 자처해 온 중국은 북한의 행보에 대해 여러 경로로 불만을 터뜨렸다.

1948년 정권 수립 이래 중소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계속하던 북한에게 1979년 미중 수교는 ‘소련과 중국이라는 2개의 갓끈 중 하나가 떨어져 나갈 뻔한’ 일대 사변(事變)이었다. 김일성은 미국과 일본이라는 2개의 갓끈에 의존하고 있는 ‘괴뢰 남조선’은 갓끈이 끊어지면 갓이 날아가듯 곧바로 무너질 것이라고 말하곤 했었다. 미중 수교로 생존의 위협을 느낀 북한은 소련에 경도됐다. 소련은 말기에 들어섰음에도 불구, 중국 견제를 위해 북한에 대규모 군사원조를 제공했다. 김정일을 차기 북한의 통치자로 인정한 것은 덤이었다.

김일성은 1984년 5월 국경 문제를 해결한다는 핑계로 소련을 방문했다. 같은 해 11월 카피차 외교차관이 이끄는 소련 사절단이 방북했다. 카피차는 대북 지원 대가로 원산항과 청진항의 군사적 사용권을 요구했다. 중국은 ‘소련의 북한 내 군사기지 설치’는 필연적으로 중국의 안보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며 강력히 반대했다. 중국은 ‘미국 제7함대의 칭다오 기항 카드’로 북한을 압박했다. 북한은 제7함대의 칭다오 기항은 북한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될 것이라 하면서 ‘제7함대의 원산항 기항을 허용할 수도 있다’고 도발했다.

북한은 중국을 동상이몽(同床異夢)의 눈으로 보는 데 반해, 중국은 북한을 순망치한(脣亡齒寒), 가도멸괵(假道滅?)의 시각으로 바라본다. 북한이 망하면 중국도 망한다는 것이다. 북중 관계는 한 마디로 ‘전략적 이해관계 불일치하의 일치 관계’다. 북중 관계의 시작은 6.25 전쟁이 끝난 지 불과 3년 뒤인 1956년 김일성이 마오쩌둥과 공산항일운동을 함께했던 윤공흠과 최창익 등 연안파를 숙청한 ‘종파사건’이었다. 1967년 박금철, 이효순 등 갑산파마저 숙청한 김일성은 1972년 ‘주체사상’을 국가 이념화하는 등 절대 체제를 구축했다.

2012년 10월 공산당 총서기에 취임한 시진핑은 북한과 베트남, 라오스 등 인접 사회주의국가 방문을 준비하던 중 북한이 김정일 사망 1주기가 되는 그해 12월 평북 동창리에서 장거리 탄도미사일 발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시진핑은 심복 리젠궈를 급히 평양으로 보냈다. 리젠궈는 ‘북한이 핵·미사일 시험을 자제하면 북한에 대한 원조를 계속하겠다’는 시진핑의 뜻을 전했다. 김정은은 ‘핵·미사일 시험은 북한이 자주적으로 결정할 문제로 중국과는 아무 관계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예정대로 12월 12일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북한은 시 주석 취임을 1개월 앞둔 2013년 2월 제3차 핵실험도 감행했다. 자존심이 크게 상한 시진핑의 김정은 무시와 홀대는 북미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앞둔 2018년 3월까지 계속됐다.

김일성은 6.25 전쟁 기간 중 이미 핵무기의 군사적·외교적 중요성을 깊이 인식했다. 북한은 1953년 7월 휴전 무렵 일단의 핵물리학도들을 동독으로 파견했다. 1955년에는 핵물리학 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다음 해에는 소련과 ‘원자력 협정’을 체결하고, 핵물리학도들을 소련에도 파견했다. 북한은 1962년 청천강변 영변에 핵물리학 연구 단지를 조성하고, 소련으로부터 연구용 원자로를 도입했다. 북한은 1976년 이집트로부터 소련제 스커드 미사일을 도입해 역설계 방식으로 스커드 미사일을 자체 제조했으며, 1984년 시험발사에도 성공했다. 김정일 집권 시기 북한은 중국이 원자탄, 수소탄, 대륙간탄도탄(ICBM) 등 양탄일성(兩彈一星)을 디딤돌로 미국과 수교한 다음 급속한 경제발전에 성공했다는데 착안, 북한판 양탄일성을 추구했다.

북한의 양탄일성 추구는 미국 군사력의 동아시아-서태평양 지역 전개 추가 확대를 가져왔다. 이는 대만 점령이라는 국토완정(國土完整)과 함께 서해와 동중국해, 남중국해 등 동아시아-서태평양 지역 패권을 노리는 중국에게 위협으로 다가왔다. 2022년 2월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한미일 군사협력, 오커스, 쿼드 등 대(對)중국 포위망이 더 촘촘해졌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래 러시아는 특히 경제적으로 중국에 더 의존하게 됐다. 중국은 자국의 이해관계에 맞추어 러시아를 관리, 이용할 여지를 갖게 됐다. 시진핑과 푸틴은 지금까지 44번이나 만났지만 중러는 서로를 깊이 신뢰하지 않는다.

러시아는 북한을 이용, 동아시아에서의 군사 긴장도를 높여 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도 회복하려한다. 러시아의 지원으로 북한이 핵·미사일 능력을 더 강화하게 되면 중국의 북한 통제는 한층 더 어려워진다. 한국 안보가 위태로워지는 것은 물론이다. 중국은 북러 밀착을 달갑지 않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중국은 국제 공급망(supply chain) 중심국의 하나로 미국의 패권에 대항하는 글로벌 강대국을 자처한다. 중국은 러시아의 ‘시커먼’ 속내를 잘 알고 있지만, 러시아와의 ‘반미 연대’를 약화시키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은 무역으로 먹고사는 통상국가다. 평화와 안정 없이는 원활한 무역이 불가능하다. 한국이 합종연횡(合縱連橫)의 복잡한 국제상황을 헤쳐 나가는 한편, 평화와 안정, 번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민통합을 기초로 한미일과 한중일, 그리고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이해관계가 다른 강대국들 사이에서 능동적으로 균형을 유지하는 외교정책을 취해야 한다. 분단국이자 통상국가 한국은 중세 베네치아 공화국이나 싱가포르처럼 이념(가치)이 아니라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 백범흠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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