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엄마·아내 아닌 ‘이름 세글자’ 빛낸 영웅들
  • 김희동기자
누군가의 엄마·아내 아닌 ‘이름 세글자’ 빛낸 영웅들
  • 김희동기자
  • 승인 2024.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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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위해 헌신한 여성 독립운동가들
곽낙원, 아들 김구 항일투쟁 도와
임시정부 요인의 든든한 ‘조력자’

임수명, 남편 따라 만주 등 오가며
비밀문서 전달 등 독립운동 지원

이은숙, 임신한 몸으로 베이징 이동
독립운동가 보필·자금 마련에 온힘

허은, 겨우 10살경 가족모두 망명길
항일지사들의 의·식문제 해결 앞장

해외 독립·의열투쟁, 임시정부 참여
국채보상운 등 조국 위해 삶 바쳐
여성 권리·사동회적 직위 향상에 기여
곽낙원 묘비앞에 선 김구 선생.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제공
곽낙원 묘비앞에 선 김구 선생.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제공

한국 근대사는 제국주의에서 벗어나 자주독립 국가를 세우는 과제와 함께 여성의 권리 및 사회적 지위 향상이라는 또 다른 과제에 직면했다. 이 시기의 여성 선각자들은 이러한 목표를 위해 민족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성들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과 3·1운동에서 큰 역할을 했으며 1920년대에는 여성단체를 조직하고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을 수용해 민족해방운동에 기여했다. 1927년에는 근우회를 조직하여 계몽과 항일운동을 전개했으며 1931년 이후에는 혁명적 노동조합과 농민운동, 반제 반전운동에도 참여했다.

해외에서 투쟁한 여성들은 의열투쟁, 무장 항일투쟁, 임시정부 및 한국광복군 참여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만주와 중국에서 망명한 여성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독립운동에 헌신하며 조국광복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다.

여성 독립운동가 곽낙원(1992년 애국장), 임수명(1990년 애국장), 이은숙(2018년 애족장), 허은(2018년 애족장) 선생 등은 독립운동의 터전을 마련하고 서신 전달과 자금 지원을 수행했다. 독립운동의 역할을 실질적으로 강화한 중요한 인물들의 발자취를 소개한다.


김구 가족사진(가흥)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제공
김구 가족사진(가흥)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모(大母) 곽낙원

곽낙원(1859~1939)은 곽창훈의 딸로 태어났다. 14세 때 해주 백운방 텃골에 살던 김순영(金淳永)과 결혼했다. 17세에 아들 김구(金九, 1876~1949)를 낳았다.

20세의 청년으로 성장한 아들 김구의 항일투쟁 여정은 곽낙원에게 평범한 삶을 허락하지 않았다. 1896년 3월 치하포에서 일본인을 처단한 일로 투옥되면서 2년여의 옥바라지를 했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1911년 또다시 ‘안악사건’으로 투옥돼 1915년 8월 가출옥 때까지 옥바라지를 지속했다.

이후 1919년 3월 아들 김구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면서, 곽낙원도 1922년 상하이로 망명했다. 상하이에서도 고단한 여정은 계속됐다. 1924년 1월 며느리 최준례(崔遵禮)가 사망하면서 어린 두 손자를 도맡아야 했다. 임시정부의 형편상 아들 김구에게 의탁할 수 없었던 처지라, 결국 1925년 11월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후에도 손자들을 키우며 힘겨운 생활을 이어갔다. 생활도 어려웠지만, 끊임없는 감시가 그를 괴롭혔다.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거 후에는 감시가 한층 심해져, 1934년 4월 손자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향했다.

자싱(嘉興)에 피신해 있던 아들 김구를 만났지만, 함께 지낼 형편은 아니었다. 이후 줄곧 임시정부의 요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일본군을 피해 피난을 거듭했다. 난징(南京)에서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 광둥성(廣東省) 광저우(廣州), 광시성(廣西省) 류저우(柳州)를 거쳐 1939년 4월 다시 충칭(重慶)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때 인후염에 걸린 곽낙원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향년 81세였다.

곽낙원은 임시정부에서 든든한 조력자로써 존재만으로도 큰 힘이 됐다. 함께 생활했던 정정화(鄭靖和)는 “그분이 우리 가운데 말없이 앉아 계신 것만 해도 우리에게는 큰 힘이 되었고, 정신적으로도 우리의 큰 기둥이 되기에 충분하였다”라고 회고했다. 또한 “매섭고, 대범하고, 절제되고, 소박한 어른으로 존경과 공경을 받았다”는 회고도 보인다. 평소 절약을 권면하였고, 돈이 생기면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사후 충칭의 화상산(和尙山)에 안장되었다가, 1948년 국내로 이장됐으며, 현재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신팔균의 전사 사실을 보도한 기사(동아일보 1924년 8월 10일자).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신팔균의 전사 사실을 보도한 기사(동아일보 1924년 8월 10일자).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만주 항일투쟁을 지원하고, 순사(殉死)한 임수명

임수명(任壽命, 1894~1924)은 1894년 출생했다. 아버지의 고향은 개성으로 추정된다. 14세 무렵 보통학교를 마치고 집안일을 도왔다. 16세 때 양친을 여의고, 18세인 1912년 서울 모(某)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다. 이 무렵 신팔균(申八均, 1882~1924)을 만났다. 당시 신팔균은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 활동을 하고 있었다. 대동청년당은 1909년 조직된 비밀결사이다. 안희제(安熙濟)·윤세복(尹世復)·김동삼(金東三) 등 80여 명의 애국청년들과 함께 단원으로 활동했다.

두 사람의 결혼 시점은 1914년 5월 10일로 기록돼 있다. 결혼 후 신팔균은 만주로 떠났다. 임수명은 개성에 머물며, 남편의 동지인 신백우(申伯雨)·서세충(徐世忠)·엄익래(嚴翼來) 등에게 서신과 비밀문서를 전달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21년 무렵 신팔균이 일본 군용 지도를 입수하기 위해 잠시 국내에 들어왔다. 남편이 떠날 때 임수명도 함께 베이징으로 망명했다. 기록마다 서로 달라서 정확한 망명 시기는 확정하기 어렵다. 망명 후 임수명은 베이징과 만주를 오가는 힘든 삶을 이어가며, 남편의 독립운동을 내조했다.

그런데 1924년 7월 2일, 신팔균이 만주 싱징현(興京縣) 왕친먼(旺淸門) 이도구(二道溝)의 산악지대에서 중국 마적과 교전 중 순국하고 말았다. 김좌진(金佐鎭)·홍범도(洪範圖)·김동삼 등과 함께 만주를 무대로 무장투쟁을 이어가던 신팔균의 죽음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임수명은 뱃속에 유복자를 임신한 상태였다. 임수명은 남편의 전사 사실을 알지 못한 채 8월 만삭의 몸으로 귀국했다. 주변에서 충격으로 인한 낙태를 염려하여 귀국을 권유했기 때문이다.

귀국 후 임수명은 서울 종로구 사직동 자택에서 유복녀를 낳았다. 신팔균과 임수명 사이에서 태어난 고명딸이다. 위로 네 아들이 있었다. 장남 신현충은 청주김씨와 신팔균 사이에서 태어났다. 귀국 후 힘겹게 살아가던 임수명은 10월 하순에 이르러 남편의 전사 소식을 확인했다. 병 중이었던 셋째 아들마저 사망하자, 임수명은 갓난아기를 데리고 음독 자결했다.

<조선일보>는 임수명의 귀국 과정과 자결 동기를 상세히 보도하기도 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포장에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서간도 시종기』육필 원고 사진.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서간도 시종기』육필 원고 사진.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이회영 일가 독립운동의 버팀목, 이은숙

이은숙(李恩淑, 1889~1979)은 1889년 아버지 이덕규(李悳珪)와 어머니 남양홍씨 사이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한글과 천자문, 소학언해 등 한문을 읽고 쓰는 능력을 두루 갖췄다. 20세인 1908년 10월 상동교회 예배당에서 이회영(李會榮, 1867~1932)과 혼인했다. 이후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남편 이회영이 지어준 영구(榮求)라는 이명이 있다.

1910년 12월 일가 60여 명이 서간도로 망명하자, 이은숙도 10개월 된 딸을 안고 함께 만주로 떠났다. 이후 일가족과 함께 만주 류허헌(柳河縣) 싼위안푸(三源堡)로 이주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설립 등 독립운동기지 개척에 일조했다. 1917년 6월 아들 이규학(李圭鶴)의 혼사로 귀국했다. 1912년부터 이미 국내에 있던 이회영이 1919년 베이징으로 가자, 이은숙도 2월 베이징으로 이동했다. 임신한 몸으로 남매를 돌보며, 독립운동가를 보필하는 삶이 계속됐다.

1년에 수십여 차례 거처를 옮겨 다닌 적도 있었다. 1925년에는 손녀 둘과 세 살 아들을 병으로 잃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결국 이은숙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생활비 마련을 위해 국내로 들어왔다.

국내에 귀국해서도 그의 독립운동 자금지원은 계속되었다. 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마련한 자금을 이회영에게 보내기도 했다. 1926년에는 자금 마련 일이 경찰에 탐지되어,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28년부터 경성부 병목정(竝木町)에 있는 고무공장(경성직뉴공장)에서 일했다. 퇴근 후에는 바느질로 장충동 일대 기생의 옷을 만들었다. 그렇게 모은 돈을 아껴 베이징으로 보냈다. 1930년 들어 경찰의 단속으로 바느질마저 여의치 않자, 남의 집의 가사를 돕는 일을 하기도 했다.

고난은 끊이지 않았다. 1932년 10월 남편 이회영이 세상을 떠났으며, 1935년 봄 아들 이규창이 상해에서 체포됐다. 징역 13년을 선고받고, 형무소에 갇힌 아들 뒷바라지를 하던 이은숙은 1940년 10월 딸 이규숙 내외가 있는 신경으로 옮겨갔다. 하숙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이은숙은 이곳에서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 뒤에도 고난은 끊이지 않았다. 그 고달팠던 삶을 『서간도시종기』에 담았다. 1966년 3월 탈고한 『서간도시종기』는 약 10년이 지난 1975년 1월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 : 서간도시종기』로 출간됐다. 1979년 12월 서울 정릉에 있는 아들 이규창의 집에서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석주 이상룡(1962, 독립장).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석주 이상룡(1962, 독립장).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서간도 독립운동의 숨은 공로자 허은

허은(許銀, 1909~1997)은 아버지 허발과 어머니 이산운(李山運) 사이에서 3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조부는 허형이며, 이육사의 어머니 허길이 바로 그의 고모이다.

또한 구미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순국한 왕산(旺山) 허위(許蔿)가 그의 재종조부이다. 허위 일가는 1908년 허위가 순국하고, 1910년 나라마저 무너지자, 연이어 만주로 망명했다.

1915년 4월 허은의 할아버지 허형도 가족들을 이끌고 망명길에 올랐다.

그 망명길에 허은이 함께하였고, 어린 소녀가 견디기 어려운 험난한 여정이 시작됐다. 망명길도 정착 과정도 고통 그 자체였다. 일가는 퉁화현(通化縣)의 여러 곳을 거쳐 겨우 류허헌(柳河縣) 우두거우에 정착했다.

허은은 당시 겨우 10살을 넘긴 어린 나이였지만, 어머니를 도와 농사와 가사를 돌보며 성장했다. 청산리전투 후 일본군의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되자, 1922년 1월 허은은 가족들과 함께 다시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닝안현(寧安縣)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혼인이 정해져 1922년 음력 섣달 이상룡(李相龍)의 손자 이병화(李炳華, 1906~1952)와 혼인했다.

그 뒤 허은은 판스현(磐石縣)·수란현(舒蘭縣) 등의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가족은 물론 만주지역 항일지사들의 그림자가 되어 온갖 고난을 견뎌냈다. 허은은 “개간에는 이력이 났다”고 표현할 정도로 시어머니 이중숙과 함께 농사일을 도맡아 했다. 특히 허은은 서로군정서 대원들의 의·식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여성들은 광목과 솜뭉치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대량으로 대원들의 옷을 생산했는데, 허은도 그 일을 숱하게 했다.

뒷날 “김동삼·김형식 등에게 손수 옷을 지어 드렸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감개가 헤아릴 길 없다”고 회고했다.

왕래하는 독립운동가들과 대원들의 음식 제공도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각종 회의가 집에서 이루어지다 보니 허은은 회의 때마다 늘 부족한 먹거리를 마련하느라 고충이 컸다. 농사가 흉년일 때는 중국 사람이 경영하는 피복 공장에서 단추구멍 만드는 일감을 가져와 부업을 해서 음식을 마련하기도 했다. “조직원들을 해 먹이는 일 자체가 큰 역사였으며, 작은 국가 하나 경영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한 허은의 회고는 만주 항일투쟁사에서 여성들의 역할을 시사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 ‘임청각’에서 고택. 종갓집 활용사업 1박 2일 체험에 참가한 청소년들.  사진=임청각 제공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 ‘임청각’에서 고택. 종갓집 활용사업 1박 2일 체험에 참가한 청소년들. 사진=임청각 제공

1932년 시조부 이상룡이 순국하자 허은은 귀국했다. 귀국 후 허은은 그 모질던 세월을 1995년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 소리가』라는 회고록으로 담아냈다.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참고자료: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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