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곧 하늘, 동학의 새로운 출발점이 된 포항 검등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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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곧 하늘, 동학의 새로운 출발점이 된 포항 검등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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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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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해월, 검등골서 ‘사람이 곧 하늘’ 법설로 동학사상 집대성

스승의 마지막 당부따라 도피 생활 중
관의 추격 피해 영양군 일월산서 은신

해월 은신처 알게된 도인 하나 둘 모여
식량·옷가지 등 경제적 후원도 나서며
경북 북부 동학 포덕의 출발지로 자리

영양서 은신 중 포항 검등골 찾은 해월
스승 수운의 탄신일 맞아 기념제 올려
동학사상 ‘포덕의 새출발지’ 자리매김
집터 가는 길 입간판.
집터 가는 길 입간판.

동학의 교리는 3단계의 발전과정을 겪었다. 교조인 최제우 단계에서는 ‘시천주’(侍天主) 사상, 2대 교주인 최시형 단계에서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 그리고 3대 교주인 손병희에 의해 개창된 천도교 단계에서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변화됐다. 물론 이 3단계의 교리발전 과정이 전적으로 단절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수운 최시형 선생이 순도한 1864년 3월부터 해월도 관의 지목을 받는다. 스승의 죽음을 귀로만 전해 듣고 시신조차 제대로 수습 못한 그는 분노와 슬픔을 삭인다.

그리고 스승의 마지막 당부에 따라 장기간 도피생활을 시작한다. 관의 추격이 심한 가운데 몇 몇 도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경북 북부지방을 떠돈다.

이윽고 막바지 숨어든 곳은 태백산맥 일월산자락 경북 영양군 일월면 용화리(윗대치)였다. 이때가 1865년 3월경이었다.

해월은 마을에 대도소를 차린다. 그리고 스승의 순도 직후 울진군 죽변 방면으로 쫓겨 가 있던 부인과 자녀들을 모셔온다.


해월 최시형 선생 집터 표지석.
해월 최시형 선생 집터 표지석.

▲일월산에서 도인들과 스승의 제례와 차별 철폐 법설 펼치다

해월이 은신해 있던 영양 일월산은 도인들 사이에 점차 소문이 나기 시작한다. 그러자 흩어진 도인들이 식량과 옷가지 등을 이고지고 몰려오기 시작한다.

하나 둘 모여든 도인들은 서로 소식을 묻고 다른 도인들에게 전파한다. 임시로 수운의 부인과 자녀들이 함께 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너나없이 경제적 후원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일은 도인들을 용화리로 모여들게 만든 구심점이 됐다. 해월이 온 지 3년 째 되던 1866년 3월10일은 스승의 순도 2주년이었다.

이날 그는 도인들과 스승의 제례를 올린다. 그리고 ‘적서와 서얼 타파’ 법설을 편다. “적서 차별은 집안을 망치고 반상 차별은 나라를 망치므로 도인들은 일체의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었다.


해월 최시형 선생 집터 축대.
해월 최시형 선생 집터 축대.

▲동학 재건의 출발점으로 결속 강화 및 포덕 활동 확대

그 해 가을 추수가 끝나자 용화리는 이주해오는 도인들의 발길이 더욱 늘어난다.

1866년 10월28일은 스승 수운의 탄신일이었다. 해월은 탄신일을 맞아 순도일(3월10일)과 탄신일(10월28일)을 기해 함께 모여 봄, 가을 제사를 지내기로 한다.

이를 위해 도인들로 하여금 ‘계’를 조직하자는 제안을 한다. 명분은 ‘스승의 억울한 죽음을 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내막은 동학 재건과 흩어진 도인들의 결속이었다.


이 덕분에 동학 조직도 그해 겨울부터 서서히 복원되기 시작한다. 교세 또한 점점 늘어난다. 경상북도 북부지방 일월산을 중심으로 동학 포덕의 새로운 출발지가 된 것이다.

1869년 2월 강원도 양양에서 도인 두 사람이 찾아온다. 이들을 만나 본 해월은 한 달 뒤 양양으로 가서 열흘간 포덕을 한다. 그리고 강원도 도인들의 상황을 알게 된다.

양양에서는 해월의 포덕으로 30여 가구가 동학에 입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1870년 10월 수운의 아들 세정은 모친과 가족을 이끌고 영양 일월산을 떠나 양양으로 이주한다.


상마북지로 변한 검등골 가는 길.
상마북지로 변한 검등골 가는 길.

▲병인양요 이후 동학사상 확산, 해월의 평등법설 선포

영양 일월산 자락은 해월에게 동학 포덕을 순탄하게 만들어준 듯 했다. 하지만 소용돌이치는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1866년(고종3년) 흥선대원군이 프랑스 천주교 선교사 9명을 처형한다. 이를 구실로 천진에 있던 프랑스 극동사령관 로즈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공한 사건이 병인양요다.

천주교 박해 보복을 앞세워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로써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극심해졌다. 이와 더불어 동학에 대한 탄압도 다시 고개를 들었다.

세상이 불안해지자 해월에게 가르침을 청하고 대비책을 논의하는 도인들도 늘어났다. 해월은 1867년 3월10일 수운의 기일 3년 탈상일 적서와 반상의 차별을 타파하라는 법설을 펼친다. 인내천과 마찬가지 이 또한 평등을 절대가치로 여기는 동학사상이다.


포항 괘령산자락 검등골.
포항 괘령산자락 검등골.
검등골 집터.
검등골 집터.

▲포항 검등골에서 새로운 포덕의 출발지로 삼다

해월은 영양에서 은신 중 고향과 다름없는 포항 검등골을 찾게 된다. 세상이 평온해진 틈을 탄 행보였다.

이 날은 천도교에서 1865년 10월 28일로 기록하고 있다. 그는 검등골에 모여든 도인들과 스승 수운의 탄신기념제를 올린다. 이때 펼친 법설은 ‘양천주’로 요약된다.

수운은 사람마다 마음속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가르쳤다. 해월은 이에 마음속 모신 한울님을 수련을 통해 길러야 한다는 법설을 펼친다.

전적으로 만민평등을 표방하고 노비해방을 몸소 실천한 수운의 가르침이 담겨 있다. 반상과 적서, 남녀, 어른과 아이, 귀천의 차별 철폐, 곧 만백성 평등의 실현이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는 동학사상을 집대성한 법설이었다. 포항 검등골은 새로운 포덕의 출발지로 떠오른 순간이었다.

 
 
 
 
 
 
 

 

 

 

 

 

 

 

 

 

 

 

 

 

 

 

김상조 문화답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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