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군은 계속되는 전투 패배에
태인전투 마지막으로 남접·북접 나눠
해월과 북접 같이 움직이며 장수 거쳐
금산·무주 등서 크고 작은 전투 치러
해월 놓친 관군, 도인 5명 무차별 사격
북실서 본격 농민군-일본군·관군 전투
집단학살 등 동학농민군 2600명 희생
상주 소모사 정의묵의 ‘소모일기’에
북실전투의 참혹상 적나라하게 기록
1894년 11월, 동학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대패한다. 이어 후퇴를 거듭하며 관군과 일본군을 따돌리기에 급급해진다. 금구, 원평, 태인 등지 전투에서도 패배한다. 농민군은 태인 전투를 마지막으로 남접과 북접으로 갈라진다. 의암 손병희의 북접은 내장산 갈재를 넘어 순창을 거쳐 해월이 머물던 임실 새목터를 찾아간다.
해월과 합류한 북접은 장수를 거쳐 금산, 무주를 지나며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른다. 이어 충청도 황간을 지나 용산에 머무르다 또 공격을 받자 보은으로 퇴각한다. 그리고 이곳과 가까운 청산을 점령하여 사흘간 전열을 가다듬는다.
추격이 임박하자 지도부는 보은 공격을 결정하고 점령한다. 관아와 토호의 집들을 불태운 후, 이튿날인 17일 대오는 보은읍 북동쪽 옥녀봉 아래 북실마을(鍾谷)로 이동한다. 이 마을은 북접대도소가 있었고, 1년 전 교조신원운동 취회를 연 장내리 바로 옆이다. 농민군은 마을과 산간, 계곡에 방어망을 갖추고 공격에 대비한다.
△보은 전투를 둘러싼 관군과 일본군의 동향
관군도 농민군의 이동로를 파악하고 보은 집결을 예상한다. 바로 옆 고을 상주에서는 양반이 주축이 된 토벌부대 소모영이 운영되고 있었다. 지휘관은 상주 유생 정의묵이었다. 그는 미리 개령, 안동, 청주 등지로 통문을 보내 군사 지원을 요청한다. 또 상주 유격대장 김석중을 농민군 토벌에 참전시킨다.
김석중은 279명의 유격대를 이끌고 왔다. 이 부대는 민보군 200명, 용궁현의 포수 20명, 함창 포수 19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김석중은 양반 유생이었으나 상주에서 동학 접주들을 색출해 처형한 인물이었다. 그는 청산에 피신해 있던 해월을 집요하게 추적하다 실패한 바 있으며, 농민군이 민보군과 치른 영동 용산 전투에도 참전한 이력이 있었다.
일본군도 경상도 일원의 병력과 무기를 모아 보은으로 향한다. 병력은 낙동병참소의 이세가와(伊勢川) 군조가 이끄는 1개 분대 8명, 대구의 미다꾸(三宅) 대위가 인솔하는 1개 분대 13명, 구와하라(桑原) 소위가 이끄는 일본군 14명 등 총 43명이었다.
△해월의 탈출과 밤을 새운 치열한 보은 전투
해월은 관군이 공격해오기 직전 북실 김소촌의 집에 있었다. 농민군은 마을 뒤 옥녀봉 아래 골짜기와 산자락, 그리고 마을 안 농가에 진을 치고 있었다. 몰래 접근하던 관군은 마을 입구에서 불을 피우고 있던 농민군 4명을 발견하고, 그중 3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한다. 생존자를 통해 해월의 처소를 확인한 관군은 집을 포위하고 집중 사격을 가한다. 그러나 해월과 지도자들은 이미 몸을 피한 뒤였다.
지도자를 단 한 명도 잡지 못하자 관군은 도인 5명을 소총으로 살육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 사격 소리에 농민군은 즉각 대응하기 시작한다. 밤 9시경에 시작된 전투는 밤을 새우며 치열하게 이어진다. 다음 날인 18일, 날이 밝자 농민군은 적이 소수임을 파악하고 더욱 강하게 밀어붙인다.
기세에 눌린 일본군은 물러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자 관군은 일본군이 물러나면 자신들도 다 죽는다며 끝까지 항전을 독려한다.
△탄약이 바닥난 농민군, 처절한 패배의 순간
농민군은 전투 초반, 겁을 내며 후퇴하는 일본군을 뒤쫓으며 관군을 압박해 적진을 에워쌀 정도로 위협했다. 이른 아침을 지나 오전 10시까지 양측의 공방전은 승패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한낮이 지나자 농민군의 공세는 갑자기 움츠러들었다. 밤낮없이 이어진 전투로 인해 화약과 탄약이 바닥나버린 것이다.
결국 농민군은 야산과 골짜기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기회로 관군과 일본군은 세 갈래로 나눠 계곡을 따라 무차별 공격을 감행했다. 무방비 상태로 탄환을 맞은 농민군이 점점 쓰러지기 시작했고, 산 위로 피신했던 농민군마저 총탄에 맞아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장면이 목격되기도 했다.
김석중 유격대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농민군을 끈질기게 추격했다. 그들의 학살은 잔인하고 끔찍했다. 겨울 눈 내린 골짜기에는 뒤엉킨 시신들이 처참하게 쌓여갔다. 저마다 배어나온 검붉은 피가 백의적삼을 물들이며 흘러내렸고, 주변에는 부서지거나 깨진 죽창과 화승총이 널브러져 있었다.
△북실 전투의 참혹한 기록, 숨겨진 학살 진실
북실은 동학농민혁명 기간 중 농민군이 가장 참혹하게 패배한 전투지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군 측 보고문에는 총으로 사살된 농민군이 300여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학살된 농민군의 정확한 수는 기록되지 않아 의도적으로 숨긴 것으로 보인다.
상주 소모사 정의묵은 자신의 진중일기인 ‘소모일기’에서 “395명이 총에 맞아 죽었고, 골짜기와 숲속에 널려있는 시체는 몇 백 명인지 알지 못한다”고 기록했다. 관군 지휘관 영남 선무사 이중하는 “칼에 베이거나 포살된 수가 395명이며, 그밖에 계곡의 구덩이와 숲속에 쓰러진 자는 헤아릴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석중은 자신의 기록인 ‘토비대략’에서 “총에 맞아 죽은 자가 2200여 명이고, 야간 전투에서 죽인 자가 393명”이라고 주장했다. ‘토비대략’은 김석중이 자진하여 소모영 유격장을 맡아 민보군을 이끌고 동학농민혁명 진압에 나서며 그 활동을 기록한 책이다.
△북실 전투 이후, 동학농민혁명의 막내려
이 전투에서 해월 등 핵심 지도부는 모두 빠져나가 목숨을 건졌다. 해월은 의암과 함께 동북쪽 청주 방향으로 피신했으나, 임국호, 이원팔, 정대춘 등 전투에 참가한 많은 접주가 희생되었다. 다행히 살아남은 농민군도 있었으며, 이들은 속리산, 구병산 등 험준한 산악지대로 숨어들었다.
반면, 일본군과 관군, 민보군의 피해는 미미했다. 농민군의 패배 원인은 무엇보다 일본군과 관군에 비해 열악한 무기와 탄약의 부족이었다. 목숨을 걸고 항전했지만, 중과부적으로 인해 희생만 거듭하게 되었다.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해월이 주도해온 동학농민혁명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된다.
△동학농민군 집단 매장지와 기념공원
북실 뒷산자락에는 동학농민군이 집단으로 매장된 장소가 있다고 전해진다. 당시 누가 누구인지 구별할 수 없어 시신을 한데 모아 묻었으며,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지형이 변해 주민들의 고증에 따라 한두 군데만 찾아낼 수 있었다. 지금도 그곳의 흙 속에서는 사람의 뼈 성분인 인산(P)이 다량으로 추출된다고 한다. 논밭을 개간하기 위해 토사를 파낸 곳도 적지 않다.
전투 현장과 매장지는 성족리, 강신리, 종곡리 접경지인 가마실골 주변에 위치해 있으며, 그 골짜기에는 높은 솟대가 세워져 있다. 이 일대 마을과 도로변 곳곳에는 많은 장승이 세워져 있다. 이들은 ‘반봉건’, ‘반외세’, ‘평등 세상’을 추구하다 숨진 농민군의 희생을 기리는 상징물이다.
바로 옆 성곡리에는 ‘보은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는 죽창을 하늘 높이 치켜든 동학농민군 위령탑이 서 있으며, 석성, 민중의 광장, 하늘계단 등 다양한 조형물과 공간들이 동학혁명의 이념과 역사적 가치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이곳은 해월이 이끈 마지막 전투에서 희생된 2600여 명의 농민군 영령을 추모하는 공간이다.
김상조 역사문화답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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