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복·박어둔 장군, 화포 들고 ‘독도·울릉 수호’
  • 허영국기자
안용복·박어둔 장군, 화포 들고 ‘독도·울릉 수호’
  • 허영국기자
  • 승인 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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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어선들이 어업중 조사한 문서
‘죽도에 관한 7개의 답신서’에 담겨
울릉·독도를 지킨 기록이 담긴‘장생죽도기’표지. 사진=한일문화연구소 제공
울릉·독도를 지킨 기록이 담긴‘장생죽도기’표지. 사진=한일문화연구소 제공
(안용복 박어둔이 총포를 가지고 있어나 사용하지 않았다는 내용을 답고 있다. 사진=한일문화연구소 제공
안용복 박어둔이 총포를 가지고 있으나 사용하지 않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진=한일문화연구소 제공
이 문서에는 소와28년(1953년7월30일)에 소개한 것, 하마다 도서관직인 담당자 도장이 찍혀 있다. 사진=한일문화연구소 제공
이 문서에는 소와28년(1953년7월30일)에 소개한 것, 하마다 도서관직인 담당자 도장이 찍혀 있다. 사진=한일문화연구소 제공

독도를 지킨 안용복·박어둔 장군이 총포를 사용해 독도와 울릉도를 사수했다는 기록이 담긴 두 종류의 문헌이 나왔다.

최초 울릉도 독도(당시 죽도는 울릉도.독도는 송도)에 들어온 일본 어선은 인슈국(伯州國;돗토리현, 시마네현)어부 오야 구에몬(大谷九衛門)과 무라카와 이치헤이몬(村川市兵門)이다.

표지에 10페이지로 기록 되어 있듯이 시마네현 하마다 시립 도서관 15842로 등록된 비밀 문서다. 표지에 문서 대출은 금지라고 표기하고 있다.

제목은 “죽도에 관한 7개의 답신서”다. 당시 일본어선들이 죽도는 울릉도를 말하고 독도는 송도로 칭하고 있다.

일본 어부들이 독도(송도)에서 불법 어업활동을 하면서 조사한 내용을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에 답변한 문서다.

안용복이 총포를 소지하고 독도와 울릉도를 지켰다는 내용이 기록된 비밀 문서에는 도쿠가와 막부에게 보낸 ‘죽도고에 관한 7가지 답변서’ 보고문은 당시 1724년 4월 3일에 기록한 원본을 보고, 1953년 7월 31일에 다시 기록한 것이며 ‘장생죽도기’는 1801년에 기록한 원본을 보고 1953년 10월에 재출판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인슈국(伯州國;돗토리현, 시마네현)어부 오야 구에몬(大谷九衛門)과 무라카와 이치헤이몬(村川市兵門)은 답변서는 시마네현에서 오키섬을 거쳐 서북 후쿠하라(福浦)에 도착, 다시 겐록쿠5년 2월11일 송도(독도)를 거처 죽도(울릉도)에 왔다.


울릉도에 도착하니 당인(唐人:당인은 조선 어부들)어부들이 30여명이나 고기를 잡고 있었다. 일본어선을 보고 이상한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당인(조선인)들을 조심하라고 들었는데 감짝 놀란 것은 화포(火砲)를 가지고 일본어선을 바라보기만 했지 발포는 없었다.

이 뿐만 아니라 바다에는 어떤 물고기가 있고 울릉도 산에는 향나무를 비롯해, 일본 육지에 없는 나무, 약초 산마늘이 많이 있다고 기록 했다.

바다에는 물고기들이 많고 해초들 가운데 일본 바다에 없는 것도 있다. 특히 보기 더문 물개(강치)가 많은 지역인 것도 기록하고 있다.

안용복이 총포를 사용했다는 기록은 1801년 병전(兵田)에 살았던 야다다카아다(矢田高當)의 ‘장생죽도기’(長生竹島記)‘죽도 도해서 6번째 기록에는 조선인을 만나 놀란 것’이란 고백서에도 ‘동굴에 총포, 대포를 걸어 놓고 있었다.

총포 2, 3정이 있고, 바로 발사할 수 있는 석화시(石火矢’서양인이 전래한 무기)가 무서웠다‘고 기록한다.

사료를 연구 발견한 김문길 박사(한일 문화연구소 소장)는 국립 고베대학 대학원 석·박사 일본사(한·일 관계사전공)를 연구하면서 찾아낸 것으로 “이런 사료는 참으로 귀하다”며 “당시 울릉도 독도에만 나는 자연 생태학, 또는 안용복과 박어둔이 영토를 수호할 때 화포를 가지고 영토를 수호한 사실을 또 한번 볼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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