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로를 이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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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로를 이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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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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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나무 가지마다 부풀어 오르던 꽃봉오리가 입술을 오무렸다. 며칠 따스해서 봄인가 싶었는데 다시 한겨울이 된 듯 춥다. 계절이 갈팡질팡한다. 오던 봄이 경로를 이탈해버린 걸까.

올해 다시 대학원 입학하는 아들 짐을 싣고 처음 가보는 학교를 찾아가는 길이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이 친절하게 길을 안내한다. 휴대폰 길 찾기 앱을 보니 최단시간에 가는 길도 있었다. 성격 급한 우리는 빨리 가는 길이 더 끌린다.

어딜 가든 길이 많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지만 초행길은 내비게이션 없인 운전할 엄두를 못 낸다. 덕분에 낯선 곳도 용케 찾아간다. 가끔 길을 잘못 안내해 목적지가 아닌 엉뚱한 곳에 도착하여 난감했던 적도 있었다.

지난해, 아들은 군 입대도 미루고 육년 동안 매진해온 학업을 좀 쉬겠다고 말했다. 뜬금없이 학기 중에 쉬겠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연구실에서 꼬박 밤을 새우기가 부지기수였고 주말에도 쉬지 못해 늘 잠이 부족하다 했다. 가시적 성과가 쉬 보이지 않으니 아득하게 느껴질 만도 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학기 중 이탈은 곤란하니 여름방학 되면 생각해보자고 말했는데 더는 미룰 수 없다며 고집을 부렸다.

전도유망하다고 추천한 전공과 대학을 큰 저항 없이 따랐던 아이였다. 가다보니 점점 자신의 길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박사과정 1년차였다. 고지가 저만치 보이는데 다른 길이라니. 온 집안이 싸늘해졌다. 힘든 일도 참고 이겨내며 뚜벅뚜벅 정주행하길 바랐다. 육 년 동안 걸어온 길을 버리고 새로운 분야로 바꾼다는 건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니라고. 누구나 한번쯤 그런 고민은 다 한다고. 학문은 한 우물을 파면서 인내의 벽돌로 한 층 한 층 탑을 쌓아가는 과정이라고. 거듭 말해봤지만 소귀에 경 읽기였다.

종종 자정이 넘은 시간에 전화해서 힘든 내색을 비췄었다. 그만큼 최선을 다한다는 넋두리로만 여겼다. 타이르면 마음을 돌릴까싶어 남편과 양동작전을 폈다. 나는 전화로, 남편은 화상통화로 며칠을 달랬지만 소용없었다. 뉴스에서 본 장면이 떠올라 무서웠다. 혹시 절망적인 선택이라도 할까 싶어 하는 수 없이 휴학이든 퇴학이든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십대 취업준비기에 나는 반 년 넘게 고향집에 머물고 있었다. 나가서 밥벌이를 하든가, 아니면 차라리 결혼이라도 하라며 부모님은 눈치를 많이 주었다. 여동생이 먼저 결혼하는 바람에 당시 나는 일명 똥차에다 백수였다. 중매하는 사람이 오가더니 엄마에게 부유한 집 재취자리를 넣었다. 혼기가 꽉 찬 나이라 그냥 그리로 보내버릴 분위기였다. 가만있다가는 엄마가 차는 대로 굴러가는 축구공 신세가 될지도 몰랐다.

군사정권이 무력으로 사회를 짓누를 때였다. 그 와중에도 거스를 수 없는 자유와 인권 같은 가치의 물결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억지 결혼 속으로 욱여넣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전문직 직업을 가진 커리어 우먼이 되어 자유롭게 살리라.

탈출하기로 했다. 미리 써둔 편지를 부뚜막에 올려놓고 옷과 책을 싸서 새벽바람을 맞으며 기차역으로 갔다. 서울서 직장 다니는 친구에게 며칠 기대다 틈 봐서 나갈 생각이었다. 친구는 마침 살던 방의 계약 기간이 다 됐으니 새 방을 얻자고 말했다. 뒤꿈치가 벗겨져 피가 비치도록 발품을 팔아서 싸고 괜찮은 방을 구했다.

이사 가기 전날, 친구는 같이 못 가게 됐다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혼자 큰 방을 감당할 여유가 없었던 나는 계약 취소 전화를 넣었다. 내가 들어가면 잔금을 받아나갈 계획이었던 사람도 차질이 생겨버리자 화가 많이 났다. 다음날 그 방에 찾아가니 텅 비어 있었다. 계약금이 부족해서 짐을 일부 맡겨놨는데 약속을 안 지킨 대가라며 내 짐까지 싹 들고 가버렸다.

서울은 눈뜨고 있어도 코 베어가는 곳이라고 하더니 과연 가차 없고 냉정했다. 나중에는 돌다리도 두들겨가며 건널 줄 알게 되었으니 수업료를 톡톡히 치른 셈이었다.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나는 알밤처럼 단단해졌다. 경로를 이탈한 대가는 쓰라렸지만 그때부터 세상이 조금 보였고 사람들을 읽을 수 있었다.

주변의 성공이나 실패 경험담을 들려주며 부모는 아이들의 길잡이가 되길 주저하지 않는다. 현명하게 안내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시대에 뒤떨어진 지식으로 혼란을 주기도 한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찾아가도록 놓아주어야 한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어야 했는데.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고 한다. 아니다 싶을 때 용기 있게 벗어나 저만의 길을 탐색하기란 쉽지 않다. 아들도 이제는 새 길을 찾았으니 자기만의 지도를 제대로 그려 가면 좋겠다. 다소 우회하더라도 만족할만한 인생의 목적지로 항해하기를 바래본다.

새롭게 도전하는 아이에게 무슨 말들을 엮어 꽃다발을 만들까 고심하는 사이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난 차는 도심으로 들어간다. 길을 안내하는 음성이 바삐 도로 상황을 알린다. 과속 단속 카메라의 위치, 우회전, 좌회전 지점을 숨 가쁘게 안내한다. 아! 남편의 외마디가 한숨에 새어 나왔다. 길을 놓쳤다.

“경로를 이탈하여 재탐색합니다. 100미터 앞에서 유턴하세요. 다른 길로 가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마지막 안내에 차가 한번 덜컹거린다. 차창 밖 목련 몇 송이가 이른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윤정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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