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우리민족은 1919년 3월 1일 독립 선언을 발표하였다.
독립선언의 핵심은 우리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부정하고 ‘독립국’임을 선언한 것이다.
독립선언이 발표된 후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많은 인사들이 중국 상해로 모였다. 이들 중 대표 29명을 선정하여 1919년 4월 10일 밤부터 다음 날까지 회합을 가졌다. 이 회합에서 가장 먼저 임시의정원을 설립하고, 회의를 통해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하고 국무총리를 행정수반으로 한 정부의 관제를 승인했다. 이로써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동녕, 조소앙, 이시영… 등은 한국사를 공부해 본 사람들이라면 여러번 들어 봤 음직한 임시정부의 주요인사들이다. 이 글에서 필자가 소개하고자 하는 인물들은 이들이 아니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독립을 위해 희생하였지만 그동안 핵심인물들 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주역들이다. 그 중에서도 대구 경북지역 출신의 인물 들을 얘기해 보고자 한다.
첫 번째 인물은 대구에서 활약한 최익무이다. 1875년 대구출생으로 1919년 겨울,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원들로부터 ‘포고 제1호’,‘포고 제2호’, ‘포고 제3호’ 를 비롯하여 ‘독립운동가‘, ‘독립축하가’ 등의 항일 문건을 전달받았다. 최익무는 이 문서들 을 수백매씩 등사하여 대구시내 각 학교와 상점들에 적극적으로 배포하였다.
이 문건들 중 ‘포고 제3호’는 “일본 정부에서는 임시정부를 해산시켰다고 선언 했지만, 이는 모두 허구이며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의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내용 이었다.
또 ‘독립운동가’는 “동포여! 용맹하게 적수 공권으로 10년의 원한을 씻 어 없애고 정의 인도가 밝게 비치는 곳에 동포 단결하여 자유의 깃발을 들고 독립 만세를 부르자.”라는 내용이었다.
그 후, 독립운동을 촉구하는 내용의 격문들을 평안도·전라도·경상도 등지에 배포하려다가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20년 12월 징역 5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32년 8월에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는 1991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두 번째 인물은 임시정부 외무원이던 이석채가 있다. 1892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난 이석채는 1920년 1월 17일 무렵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려고 만주로 갔다가 유하현에서 군무부장 노백린을 만났다.
이석채는 국내에서 준비해 간 1000원을 노백린 에게 임시정부 자금으로 제공하고 임무를 받았다. 임시정부의 외무원이 된 이석채는 1920년 2월 서울로 돌아왔고, 그에게는 국내 민정 시찰과 함께 임시정부 참가자를 확보하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그는 강릉과 삼척 일대에서 임시정부를 알리고, 또 거기에 참가하도록 권유하다 붙잡혀 징역 2년형의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민주공화제 와 국민주권의 역사를 열었다는 점이다. 전체군주제에서 민주공화제로, 군주주권에 서 국민주권의 역사로 바뀐 것이다.
오늘날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고 민주 공화제 체제에서 살게 된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비롯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희 생으로 인해 얻어낸 결과물이다. 1919년에 수립되어 1948년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기까지 어려움에 처한 때도 많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대한민국이란 국가를 유지하며 살 수 있게 된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박혜란 경북북부보훈지청 보상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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