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중부지역, 암흑을 밝힌 독립 운동가들
심산 김창숙 선생, 시대와 맞서 싸운 조선의 마지막 선비
황산 허 위 의병장,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불굴의 구국의 영웅
박희광 애국지사, 남만주 무순, 봉천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사적지를 통해 보는 독립운동 활동의 흔적
꿈새김판 속 인물들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훈한 33인의 독립유공자 중 1945년 광복을 미처 맞이하지 못한 채 돌아가신 분들로 왼쪽부터 민영환, 최익현, 이준, 안중근, 강우규, 유관순, 손병희, 이승훈, 김좌진, 윤봉길, 안창호, 홍범도, 한용운, 오동진 등이다.
광복 78주년 잊으면 안될 이름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이 이분들 뿐만은 아니기에 본지는 독립운동 사적지를 찾아 그분들의 이름을 호명하는 대 장정을 펼치고 있다.
□대구지방보훈청
대구지방보훈청(지청장 박현숙)은 대구·경북 일원 2개 경북북부·남부보훈지청과 국립영천호국원 및 국립신암선열공원을 관할하는 기관이다. 국가를 위한 고귀한 헌신을 잊지 않고 보답하는 마음을 담아 그 분들을 예우하고 국가유공자의 명예로운 삶을 위해 보훈가족이 중심이 되는 ‘국가가 끝까지 책임지는 일류보훈’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대구지방보훈청 관할로 대구를 비롯해 고령 성주 김천 칠곡 구미 군위 경산 청도 상주 등 9개 지역이 있다.
▲고령
우곡면사무소 3·1운동 만세시위지는 1919년 4월6일과 8일 박영화·박채한 등의 주도로 우곡면 도진동민들이 3.1운동 만세시위를 전개하던 곳이다. 고령읍에는 만주지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김상덕의(1891-납북) 집터가 있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재학중 1919년 1월 조선독립청년단을 결성하고 2·8독립선언에 서명을 했다. 이 일로 징역 6월의 옥고를 치렀다. 광복후 반민족행위특별법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으나 1950년 납북됐다.
▲성주
성주군 칠봉면 대가리에 김창숙(1879-1962)이 태어난 생가가 있다. 1919년 유림단독립청원운동(일명 파리장서운동)을 주도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성명학교 교사-청천서당은 1910년 김창숙이 청천서당에 설립한 근대식 교육기관이다. 그 재원은 김창숙이 국채보상금으로 모은 자금이었다.
김창숙(1879-1962)은 일제 강점기에 격렬하게 항일 독립투쟁을 벌이고, 해방 후에는 치열하게 반독재 민족통일운동을 벌인 애국지사이다. 인재양성의 구호를 외친 교육의 선구자이자, 흐트러짐 없는 지조와 절개를 갖춘 한민족의 선비였다. 광복 이후에는 다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구심점이 됐고 전국 유림을 정비해 ‘성균관대학’을 일으켜 국학의 정통성을 되살린 민족문화 창달의 주축이 됐다.
월항면 대산리에는 만주에서 한동·덕흥보를 개척, 독립군기지건설에 주력했던 이승희(1817-1916)가 태어나 살던 생가가 잘 보존돼 있다.
초전면 고산리에는 제1차 유림단 회의지-백세각이 있다. 성주의 야성송씨 문중이 1919년 파라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의 서명과 성주지역 만세운동 참여를 논의했던 곳이다.
▲김천
1896년 2월26일 김산 유생 여영소·여중용 등이 김산향교에 모여 통문을 띄우고 향회를 열어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한 김산의병 창의지- 김산향교가 있다. 그해 4월 7일 여영소·허위 등이 2차로 직지사에서 다시 김산의진을 일으킨 감산의병 창의지-직지사 등이 있다.
▲칠곡
칠곡군 지천면에 강원형(1862-1914)이 살았던 집이 있다. 그는 1985년 명성황후 시해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대한제국기 국권수호를 위해 상소운동을 펼쳤다. 1914년 9월 서울에서 동지들과 국권회복을 도모하다 분을 참지못하고 분사(憤死)했다. 가산면에는 1919년 성주 3.1운동을 주도하고, 독립청원서 초안을 작성한 장석영(1851-1926)이 1920년대 살던 집이 있다. 그는 1912년 해외독립운동 상황과 해외 이주자들의 동태를 기록한 「요좌기행」을 저술했다.
▲군위
1919년 3월26일 조성우의 주도로 수백 명이 장날을 이용해 만세시위를 펼친 의흥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가 있다.
▲청도
1908년 9월 신교육을 위해 설립된 사립학교이며 1919년 3월18일 운문면 만세시위 운동을 결의한 문명학교 터가 있다. 청도역 부근 군용 열차 전복 의거지는 1931년 만주로 파견되는 일본군과 무기를 실은 군용열차를 전복시키려 했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청도읍 거연리 단산서당 3·1운동 만세시위지는 1919년 4월20일 이승덕을 비롯한 단산서당 학생들이 만세시위를 모의하고 태극기를 만들던 곳으로 빈터만 남아 있다.
▲구미
1919년 4월8일 임은동 주민 300여 명이 만세시위를 전개했던 임은동 동산 3·1운동 만세시위지가 있다.
13도 창의군 대장을 지냈던 허위(1854-1908)가 태어난 집이 있던 허위 생가터는 현재 왕산허위선생 기념공원으로 잘 정비돼 있다. 그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주권을 침탈해오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4차례에 걸쳐 의병항쟁을 일으켰다.
장진홍(1895-1930)이 태어난 생가 터 역시 근린공원으로 잘 조성돼 있다. 그는 1914년 조선보병대에 입대하고 1916년 제대한 뒤 비밀항일 결사인 광복단에 입단했다. 1927년 10월 조선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하려했다. 1929년 오사카에서 체포돼 1930년 대구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상고했으나 역시 사형이 선고되자 서대문형무소에서 자결했다.
박희광(1901-1970)은 일제강점기 시절 남만주 무순, 봉천에서 활동했다. 무장독립운동단체 대한통의부와 임시정부와 연계를 맺고 조직돼 압록강 연안지역을 관할하던 참의부(參議府)에 가담해 만철연선 친일파 제거,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했다. 이후 김광추, 김병현과 함께 남만주 일대에서 3인조 암살단(만철연선일대의 친일파 토벌대)으로 활동했다. 1924년부터 1943년까지 뤼순형무소에서 신채호, 이회영, 우덕순, 김병현 등과 함께 수감 생활을 했으며 선생은 감옥에서 갖은 고문을 받았으며, 출옥 후에도 고문 후유증으로 시달렸다고 한다. 뤼순형무소 수감 독립운동가로서는 최장기 복역수였으며, 복역 중 일본천황 즉위와 황태자 출생 등 두 차례 감형돼 출옥했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됐다. 현재 생가터 복원과 기념관 건립을 추진중에 있다.
▲경산
대왕산 죽창 의거지는 1944년 7월15일 안창률·김명돌·박재달 등 29명이 일제의 징용에 저항하기 위해 죽창과 투석으로 일본 경찰 30여명과 전투를 벌인 곳이다.
▲상주
광복회 채기중(1873-1921)이 1873년 태어나 1906년 경북 영주군 풍기면 동부동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살던 채기중 생가가 있으며, 일제강점기 국내와 만주 및 중국 관내에서 활약한 권준(1895-1959)이 살던 집터가 있다. 그는 1917년 광복회에 참여해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다. 광복이후 1946년 12월 귀국해 1948년 제106여단장, 초대수도경비사령관, 제103사단장 등을 지냈다.
안동의병 전투지-태봉은 1894년 안동의진 및 1896년 3월 29일 안동·호좌의진 등 7개 연합의진이 일본군과 전투를 치뤘다. 상주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는 1919년 3월 23일 500여 명이 상주장날을 이용해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1907년 의병을 일으킨 노병대(1856-1913) 의병장이 태어난 노병대 생가 터가 있으며 1907년 노병대 의진이 주둔했던 청계사가 있다.
▲김영수 광복회 구미시지회장
김영수(70) 지회장은 김길상(1924-1985) 지사의 아들로 독립유공자다.
김 지사는 상주읍에서 태어나 1942년 9월10일 일본군 함흥 제43부대에 강제징병으로 끌려가 중국 북지로 파견됐다. 1944년 9월 중국 호남성 장사지구에 주둔중 광복군으로 입대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았으며 1944년 12월에 일본군 1개부대 20명을 사살하고 탈출해 1945년 4월 광복군총사령부 경위대(토교대)에 입대했다.
이승주 한필동 김동필 김동필 김창갑 주경돈 등 동지와 더불에 대적선전및 첩보 공작을 벌였다. 임시정부 주석인 김구,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 등 임시정부 요원의 수행임무를 맡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국군으로 광복 전까지 군인으로 특수임무를 수행했다. 광복후 고향으로 돌아와 28년간 경찰에 투신했다.
김영수 지회장은 “광복후 경찰에 투신해 6.25를 겪었으며 성품이 온후하시고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며 자식사랑하는 마음이 남달랐다”고 회고했다.
김영수(70) 지회장을 만나기위해 광복회 사무실을 찾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타 지자체마다 보훈회관이 있어 각 보훈단체들이 모여 교류를 하는데 구미보훈회관에는 3개 단체가 있으며 나머지 단체는 뿔뿔이 흩어져 있다.
김영수 지회장은 “보훈회관 이전계획이 금오산에 있는 경북도립도서관으로 잡혀 있다”며 “하루 빨리 문제가 잘 해결되어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도움주신분 : 박송호 심산 김창숙 선생 기념관 연구원, 박현주 구미시청 홍보실 주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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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후손들은 공부를 많이 했고, 그리고 부모의 힘으로 지금까지 누리며 살고 있으나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공부도 못하고 쫓기며 살아왔기에 지금도 어려움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독립운동가들의 은덕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기본 정신인데 지금 최근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헌법을 부정하는 윤석열 정권이라는 사실이다.
육군사관학교의 정통성은 독립군이 아닌 일본 육사로 생각하는 것 같으며 김문수·전광훈의 홍범도 비난 논리를 윤 정부가 이어받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들에게 지금 와서 민족주의자인지 공산주의자인지 굳이 구분하는 이유를 모르겠으며 낡은 이념의 잣대로 그들을 편 가를수록 정작 구분해야 할 독립운동가와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경계가 흐릿해짐을 느끼게 된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