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잡직(雜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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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잡직(雜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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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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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수명이 모인 모임에서 자기 소개가 이어졌다. 한 50대 후반의 남성이 ‘저는 잡직(雜職)입니다’라고 소개하지 않는가! 필자도 잘 아는 사람이다. 직장을 오래 다니다가 퇴직한 후 대학에서 강사를 하면서 자신이 만든 연구소 대표를 하고 그 외에 이런저런 단체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이 말을 듣고 나야말로 잡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가락을 꼽아 보니 꽤 여러 곳의 일을 하고 있었다.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고문을 하고, 모 기금의 자문위원, 모 연구소의 이사, 모 재단의 이사, 모 기관의 사외이사, 모 학회 부회장, 모 개발원 부회장, 대학 겸임교수, 네번째 책을 쓰고 있는 저술가 등이다. 곰곰 생각하니 위원장도 하나 있다. 수년 전에 후배가 날 보고 말년에 관운이 있다고 하더니 거창한 직함만 잔뜩 가지게 되었다. 돈으로 따지면 빛 좋은 개살구인 셈이다. 그 후배가 맞았다고 해야 하는지 틀렸다고 해야 하는지 헷갈린다. 뭐든 꿰맞추다 보면 맞기는 하니.

이런 생각을 하는 중에 옆에 앉은 은퇴 업계의 선배님에게 근황을 물어보니 필자 못지않게 다양했다. 우선 근사한 곳에 상임 감사 직함을 하나 갖고 있었다. 이번에 3년 다시 연임된다고 하니 부러울 따름이다. 그런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장학재단의 이사, 학교 강의 등 다양한 곳에 적을 두고 있었다. 필자와 거의 비슷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그분은 500클럽에 가입했다고 하지 않는가. 500클럽은 41년 8개월, 즉 500개월 이상을 월급 받은 사람이 가입할 수 있다. 일자리에 거의 42년을 있은 셈이다. 이제 34년을 직장생활 하면서 400클럽에 가입했다고 자부하는 필자는 조용히 꼬리를 내렸다.

며칠 후 남산을 걷고 차를 마시면서 또래들 간에 일자리 찾기 이야기들이 시작됐다. 한 명은 오후에 드론 실기 시험을 봐야 한다고 했다. 강의도 다 듣고 이론 시험도 보았다고 한다. 실업 급여 수령이 끝난 지금 조경사 자격증에 이어 드론 자격증에 도전한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참 부지런하다는 생각을 했다. 퇴직한 지 얼마 되었다고 벌써 조경사 자격증에 드론 자격증까지 딴다니. 드론 수강생 중에 60세 넘은 사람은 본인뿐이라고 했다. 게다가 필기는 자신 있는데 실기는 게임을 잘하는 젊은이를 따라가기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 이 정도 실천력이라면 성공적인 인생 2막을 살아갈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3% 정도 합격한다는 나무의사(수목진료전문가)에 도전해볼까 생각 중이라고 했다. 합격하면 건강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자격증은 누구나 응시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관련 석, 박사나 혹은 현장 경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조경기능사 자격증을 갖고 3년 이상의 경력을 가져야 응시자격이 주어진다. 3년 지나서 겨우 시험에 합격해도 그때는 60대 후반이 되어 자격증이 쓸모가 있겠냐는 말들도 있었다. 필자는 자격증은 아무나 따는 거 말고 따기 어려운 걸로 해야 한다고 말해줬다.

다른 한 명은 중소기업에 면접 보러 갔다가 연봉을 4000만원 부르고 난 후 업체에서 다시 연락이 없다는 얘기를 했다. 네고도 없이 연락이 오지 않아 조금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 것이다. 필자가 면접 때 ‘얼마를 주든 감사히 받겠습니다’라고 일단 말하고 난 뒤 조금씩 네고를 해가야 한다고 했더니, 본인도 그렇게 말했는데 그쪽에서 자꾸 금액을 제시해보라고 해서 4000만원을 불렀다고 한다. 적어도 공장 관리자인데 그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면접 때 사장은 이번에 영업 이사를 뽑았는데 한 달에 250만원 준다는 말만 했다고 한다. 이게 사장이 생각하는 적정 연봉이었던 것이다. 면접을 보러 간 당사자는 ‘아마 사장이 나이 60세 가까운 좋은 경력자를 아주 싸게 쓰는 전략’을 쓰는 것 같다고 했다. 이제 시작이니 앞으로 계속 면접을 봐 볼 예정이라 한다. 공장을 관리하는 전문성을 갖고 있어서 어디 든 취업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생 2막에는 다양한 일들을 한다. 자격증도 여럿 갖고 일도 여럿 갖는 사람들이 많다. 일의 포트폴리오를 갖는 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잡직(雜職)이다. 그런데 무작정 잡다한 일만 하는 게 아니라 주된 일자리가 하나 있고 그 주변에 다양한 일에 관여하는 게 좋다. 주변의 다양한 일은 보수는 많지 않지만 사회에 참여하는 혜택을 누린다. 심지어 회비 등 본인이 내야 하는 돈이 더 많을 때도 있다.

필자의 경우 기업체 강의를 가면 아는 내용을 전수하는 재미도 있고 교육 담당자들과 수강생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보람도 있다. 유튜브 촬영을 위해 가면 작가나 피디(PD) 등 젊은 사람들을 주로 만난다. 새로운 사람들을 계속 만나다 보니 현직에 있을 때보다 쌓이는 명함은 많은 듯하다.

허브 앤 스포크(hub and spoke)라는 말이 있다. 허브는 자전거 바퀴의 중심축을 말하며 스포크는 자전거 바퀴를 지탱하는 살을 말한다. 인생 2막은 이런 일의 시스템을 갖는 것 같다. 주로 하는 일이 있고 다양하게 여기저기 관여해서 하는 일이 있다. 이들이 일의 포트폴리오를 이룬다. 허브 앤 스포크가 자전거의 바퀴를 이루고 그 바퀴가 삶이라는 자전거를 움직인다. 인생 2막에는 잡직이되 허브 앤 스포크와 같은 조직화된 잡직이면 좋을 듯하다.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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