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군 최악의 패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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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 최악의 패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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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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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1월 30일, 소련군에게 포위되어 스탈린그라드에서 항전을 계속하던 독일 제6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대장은 히틀러의 친서를 받는다. 자신을 원수로 진급시킨다는 진급 명령서였다. 이것은 소련군에게 항복하지 말고 자살하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파울루스는 자살을 거부했고, 다음날 사령부를 습격한 소련군에게 생포되었다. 2월 2일, 독일군 마지막 수비대가 무너졌고, 파울루스는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독일군과 주축국 병사 60만 명 이상이 투입된 전장에서 약 9만 1000명이 포로로 잡히고 나머지는 전멸했다. 이 포로들 중에서도 종전 후에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500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승리는 했지만 러시아군의 희생도 엄청났다. 정확한 숫자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추축국 병사들보다 많았으면 많았지 적지 않았다. 민간인 희생자 수도 엄청났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승승장구하던 독일군의 패전의 상징이고, 민간인 포함 수백만에 달하는 사상자를 낸 끔찍한 전쟁이었다. 이런 참극이 벌어진 일차적인 책임은 히틀러에게 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애초에 벌어지지 않아도 될 전투였다. 물론 이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다른 곳에 전투가 벌어졌을 것이고, 양측은 한쪽의 병력이 다 소모되기 전에는 전쟁을 그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불필요한 곳에서 불필요한 희생을 냈다는 것은 반성하고 검토해야 할 사안이다.

1942년 후반, 독일군의 모스크바 공략 작전은 실패가 분명했다. 소련군은 반격을 개시했고, 전 전선에서 독일군의 열세, 독일의 병력, 보급, 물자 등 모든 역량이 소련을 점령하기에는 불가항력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국민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독일군 지휘부는 이 사실을 알았다. 장성들은 우크라이나에 병력을 모아 우크라이나만 점거하자고 했다. 식량과 자원이 풍부한 우크라이나는 독일이 1차 대전 전부터 병합하고 싶어 했던 땅이었다. 보급도 용이하고, 독일군의 역량을 집중하면 소련군의 탈환시도는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독재자가 이 제안을 거부했다. 모스크바 점령 실패에 실망한 히틀러는 새로운 보상을 요구했다. 아니 수세와 방어전에 치중한다는 자체를 견뎌낼 수 없었던 것 같다. 그의 권력은 승승장구를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었다. “전진이 아니면 패배다.” 군사적으로는 틀린 말이지만, 독재자에겐 옳은 말이었다. 선동과 폭력으로 권력을 잡은 히틀러에겐 더욱 그러했다.

히틀러는 우크라이나에 있는 병력을 전진시켜 로스토프를 점령하고, 카프카즈 유전지대를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렇게 독일군이 동쪽으로 진격하면 북쪽에 집결해 있는 소련군에게 측면을 길게 드러내게 된다. 독일군은 카프카즈 원정군의 측면을 엄호하기 위해 B집단군을 둘로 나눠 절반은 로스토프로 절반을 북쪽으로 파견했다. 이 작전의 명칭이 청색작전이었다(독소 전쟁에서 독일군은 색깔로 작전명을 삼았고, 소련군은 별 이름을 작전명으로 썼다).

청색작전: 모여드는 독일군

청색작전의 영역에는 동서로 흐르는 돈강과 남북으로 흐르는 볼가강이 있었다. 이 두 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공업도시가 스탈린그라드였다. 현재의 볼고그라드이다. 제정시대에 이 도시는 차리친이라고 불린 요새도시였다. 1918년 스탈린은 이 도시에서 적군을 지휘해 백군의 공격을 4개월 동안 막아낸다. 이 항전으로 스탈린은 레닌의 눈에 들었다.

스탈린은 훗날 이 차리진 전투가세비키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결정적 사건이었다고 포장했다. 당연히 그 정도의 승전은 아니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이 도시에 자신의 이름을 부여하고 자신과 볼셰비키 혁명, 새롭게 탄생한 소련의 역량과 에너지, 공산주의가 주는 풍요를 상징하는 도시로 재건했다. 스탈린그라드 점령은 독일군의 처음 목표에는 없었다. 히틀러의 명령이 마땅치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처음부터 독일군의 작전 목표가 명확지 않았다. 소련군을 공격할 것인가? 전술 거점을 점거하고 방어선을 구축할 것인가? 방어거점을 점령한다면 어디를 먼저 점령할 것인가?

스탈린그라드는 이 모든 목표에서 벗어나 있었다. 도시 인구는 50만명이었지만, 소련군도 없었고, 우크라이나에서 너무 멀었다. 유일한 전략적 장점은 소련 제3의 공업도시로 막대한 군수품 공장과 전차가 생산되는 지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도시를 점령해서 파괴하는 소련의 생산능력 못지않게 이 긴 보급로를 유지하는 독일군의 비용이 더 커질 수도 있었다. 만약 스탈린그라드가 목표라면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에서 스탈린그라드에 이르는 긴 수평 라인의 측면을 엄호하기 위해 북쪽으로 1개 이상의 집단군을 다시 파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틈엔가 스탈린그라드가 독일군의 목표가 되었다. 파울루스의 6군이 스탈린그라드를 향해 진격했다. 뒤늦게 스탈린의 이름을 딴 도시를 함락한다는 사실에 매력을 느꼈던 것인지도 모른다. 스탈린이란 이름이 독일군의 군화에 짓밟힌다면 소련 국민의 사기, 저항 의지가 떨어질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이것도 해석과 평가가 애매한 부분인데, 독일은 민주주의의 역사가 짧았다. 1차 대전의 패배로 제정이 폐지되고 비로소 공화국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민주국가는 국민이 주역이다. 국민의 사기, 항전 의지가 저하하면 전쟁을 포기한다’는 명제를 남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아무튼 독일군 25개 사단이 스탈린그라드로 향하자 소련도 병력을 급파했다. 이때 스탈린그라드에 남아 있는 수비대는 정규군 1만에 노동자를 모아 급조한 민병대 1만 5000명뿐이었다.

회색 도시의 시가전

8월 23일 독일 폭격기가 도시의 상공을 덮었다. 무자비하게 도시를 폭격하고, 9월 12일에야 보병이 도시로 진입했다. 스탈린그라드는 배수진을 친 도시였다. 도시 동쪽 끝이 남북으로 흐르는 볼가강에 막혀 있었다. 독일군의 작전은 서쪽에서 도시로 진입하고, 남북에서는 강을 따라 진격해서 도시를 강에서 도려내는 것이었다. 처음 구상은 이랬는데, 실제 작전은 삼면에서 풍선을 내리 누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파울루스는 손쉬운 승리를 확신해 마지않았고, 정말로 그렇게 되는 듯 보였다. 독일군은 거의 어깨를 맞대고 폐허가 된 도시를 쓸고 지나갔다. 독일군은 도시를 대부분 점령했다. 선착장을 내려다보는 마마예프 쿠르간이라는 묘지로 사용하는 작은 언덕만 점령하면 도시는 완전 함락이었다. 선착장을 확보하면 소련군은 증원 병력을 보낼 수도 없게 된다.

함락 직전에 선착장을 통해 젊은 로딤체프 장군이 지휘하는 사단 병력이 증원군으로 투입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사단장 이하 거의 전 병력이 전사했지만, 육탄으로 최후 거점을 방어했다. 강변에서 벌어진 3일간의 전투는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 로딤체프 사단의 구원이 있었다고 해도 독일군은 압도적인 상황에서 남은 100m를 왜 전진하지 못했을까? 마마예프 언덕은 평범한 언덕이고, 요새화된 진지도 없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독일군 생존자가 드물고, 소련군도 이 전투를 목격한 생존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소련 측은 자료가 충분히 편집되어 있다. 따라서 이 전투의 구체적인 상보를 알아내기는 힘들다. 몇 가지 추정을 해 보자면, 시가전은 도시의 건물과 주택 자체가 요새이자 바리케이드이긴 하지만, 소련군 병력이 열악한 상황에서 독일군은 폭격으로 시간을 낭비했다. 보병을 투입했을 때도 스탈린그라드의 약점과 전략적 지점이 선명했음에도 집중의 원리를 구현하지 못하고, 빗자루로 쓸어내기식 인해전술로 일관했다.

산개한 병력으로 적을 견제하면서 주요 거점에 병력과 화력을 집중해서 하나씩 석권해 나갔더라면, 특히 북쪽에서 마마예프로 진입하는 구간은 더더욱이 칼날처럼 강하고 빠르게 파고들었더라면, 도시 공습에 사용한 폭격기와 폭탄을 강 건너 소련 증원부대의 견제에 사용했더라면, 포병이나 전차포로 선착장을 견제했더라면 적어도 스탈린그라드의 전사는 다르게 쓰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독일군이 도시를 완전히 점령하고 요새화했더라면 스탈린이 거꾸로 자신의 도시를 탈환하기 위해 자신의 군대를 무자비하고 애꿎게 소모해 버렸을 수도 있다. 마침내 소련군은 방어에 성공했고, 이때부터 다음 해 2월까지 4개월간 도시에서 승자도 패자도 없는 처절한 시가전이 벌어진다. 그러다가 소련군이 스탈린그라드 서쪽으로 진입해 포위하면서 독일군에게는 죽음의 도시가 되어 버린다. 파울루스는 천재 참모로 불렸다. 하지만 그의 천재성도 의문이 있다, 그는 눈에 보이는 자료는 정확하게 정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판단력은 확실하지 않았다. 그는 야전지휘관을 한 번도 경험하지 않고 승진해서 6군 사령관이 되었다. 전투 상황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함부로 비난하기는 미안하지만, 파울루스의 초기 작전은 전형적인 참모형 전술이다.

완벽한 우위를 확보한 상태에서 확실하고 교과서적인 승리를 추구하는 전술. 전투는 목숨을 건 모험이다. 아무리 쉬워 보이는 전투라도 평탄한 승리를 추구한다면 무능이거나 책임 방기이다.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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