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수도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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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 난 수도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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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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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주방 수도가 탈이 났다. 설거지를 하려고 물을 틀었더니 물줄기가 지나치게 가늘다. 콸콸 나오는 물에 익숙했던 터라 갑갑증이 올라왔다.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배관마저 보이지 않아 어디가 고장인지 알 수가 없었다. 급기야 화장실로 그릇들을 가지고 가서 씻게 되었다.

40년이 넘은 아파트는 관절이 낡아 삐걱거린다. 가끔은 배관이 동맥경화에 걸려 있기도 하다. 어설프게 잘못 건드려지면 어떤 문제가 불거져 나올지 예측하기 어렵다.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하니 소장과 경비아저씨가 같이 올라왔다. 다른 곳은 물이 잘 나오는지 확인하더니 수도꼭지를 하나 사오라고 했다. 사 온 수도꼭지를 갈아끼우는 관리소장의 손놀림이 매우 조심스럽다. 배관이 낡아 잘못 건드리면 큰 공사가 될지도 모른단다. 싱크대 앞에 서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후 바꾼 꼭지에서 또옥, 똑, 또옥 물이 떨어졌다. 가슴이 서서히 불안으로 물들어간다. 할 수 없이 다시 관리사무소로 전화를 걸었다.

다시 방문한 소장은 수도계량기를 잠그고 온수 쪽 파이프의 꼭지를 돌렸다. 시커먼 물이 조금씩 조금씩 흘러내렸다. 나사를 조였다 풀었다를 여러 번 되풀이하면서 만약에 잘 고쳐지지 않으면 노후된 배관이 문제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타일을 다 뜯고 낡은 배관을 교체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소장이 다시 드라이버로 꼭지를 고정시키고 잠가둔 수도를 틀어봤다. “쏴‘ 하며 시원하게 물이 쏟아진다. 또 문제가 생기면 다시 살살 고쳐서 써 보자며 소장은 돌아갔다. 왜 갑자기 고장나 버려지는 수도꼭지를 닮았단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얼마 전 버스 안에서의 일이다. 앉을 자리가 없어서 손잡이를 잡고 섰는데, 앞에 앉은 고등학생이 벌떡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내 주변에 서 있는 사람이 나말고는 없었다. 괜찮다고 해도 굳이 앉으라고 하기에 자리에 앉는데, 기분이 묘하다. 자리 양보는 늘 내가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젠 누가 보더라도 자리를 양보 받는 나이로 보인다는 생각에 문득 서글퍼졌다.

요즘 들어 시간의 강을 흐를 수 밖에 없음을 절실히 느낀다. 팔팔했던 청년시절엔 뭐든지 가능해보였다. 세상의 어떤 어려움도 넘을 것 같았고,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할 것 같았다. 이만큼 살아보니 도저히 마음만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이 점점 늘어났다.

사람도 물건도 시간이 가면 서서히 힘을 잃어가는데 그 약해지는 힘을 조절하지 못해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 한꺼번에 몰아서 일을 하다가 몸살을 앓기도 하고, 얼마 남지 않은 횡단보도의 신호를 보고 뛰다가 중간에 신호가 바뀌어 당황하기도 했다. 조심조심 걷지 않으면 작은 턱에도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20대 시절엔 이 나이가 안 올 줄 알았다. 저분들은 무슨 낙으로 사나? 궁금했다. 그 나이를 지나면서 마음은 여전히 20대를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몸은 정직했다.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레 사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즈음은 횡단보도에 남은 시간이 적으면 절대 뛰어서 건너지 않는다. 집안일도 절대 한번에 많이 하지 않는다. 내 체력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여러 번에 나누어서 하게 되었다. 현재의 나의 상태를 인정하는 것이 어렵지만, 타협하는 것이 필요하니 어쩌겠는가?

물을 틀었다. 쏴하며 쏟아지는 물에 그릇을 씻으며 수도꼭지처럼 몸도 바꾸어 쓰면 얼마나 좋을까? 잠깐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어차피 수도꼭지처럼 바꾸어 쓸 수 없는 몸이라면 약해진 육신을 살살 달래가며 사는 것 또한 지혜이리라.

전영숙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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