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탄(高靈歎)의 음미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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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탄(高靈歎)의 음미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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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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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고, 동량의 인재들인 두뇌 집단이 흉악한 사람의 손길에 걸려 몰살을 당했으니, 국운의 함몰이라 사람도 귀신도 그 동안 뭐했나 몰라 ! 단순히 ‘비운의 천재(天才)’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나라의 보배들이다. 이런 비극적 참화를 지켜본 일반 백성들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억울하게 죽어가는 지식인들의 비통함에 몸부림치는 심정은 누구나 적개심은 활화산같이 불탔을 것이다.

세종도 이미 신하를 떠났고, 문종도 또한 하늘 손님이 되었다. 세종은 손자(단종)를 몹시 사랑하여 성왕(聖王)께서는 일찍 부탁 말씀이 있었다. “천추만세 후에 경들은 이 손자 잘 돌봐주기 바란다”는 분부 말씀이 귓전을 치는 데, 그러던 그 손자는 어떡하고 어디로 갔는가? 이 일은 절대로 말할 수 없다.

청령포(영월)의 물은 맑고 두견새는 밝은 달빛에 운다. 두견새 소리는 들리지 않고, 다만 목매 죽은 문종의 혼령이 두견이 되어 밤새도록 목매어 절규하며 토해 낸 그 피만 보이네. 그래서 『영월제영(寧越題詠)』 책 속에 「자규제가(子規啼歌)」에 피를 토한 두견새의 슬픈 사연을 글로 남겼구려.

이러한 패덕질에 인륜의 본령은 산산히 부서지고, 정의(情誼)는 싸늘하게 식어 굳은지 오래이다.

인수 박평년, 근보 성삼문, 중장 하위지, 백고 이개, 태초 유성원, 신지 유응부, 좌의정 김종서, 영의정 황보인 여기에다 시문이 뛰어나고, 당대 명필가인 안평대군, 순흥에 유배 간 금성대군 이 사람들이 다 죽었네, 황천객이 되었네, 그런데 나는 혼자 살았네, 아직 살았네.

수십 년간 활개치며 노닐다 아직 부귀영화 절반도 누리지 못하였는데, 인생이 끝내 여기 그치고 마는가? 어림없는 소리지, 그러나 일월(日月)은 나를 돕지 않고, 부귀도 나를 머물러 주지 않네.

59년에 가니, 가기 싫은 길을 가고 가서 어느 곳에서 누구를 어떻게 만날 것인가? 성왕(세종)은 내 위에 계시네. 근보(성삼문)도 내 곁에 있고, 인수(박팽년)와 태초(유성원)도, 백고(이개)도, 중장(하위지) 그리고 신지(유응부)도 더불어있네.

왜 이 사람들이 눈을 부릅뜨고 나를 쏘아 보는가. 가장 친한 벗인 근보(성삼문)와도 절연 당했고, 모진 고문을 당하는 마당에서 입에 담지 못할 모욕도 당했다.

인간 사회에 크나큰 충격을 안겨준 계유정난에 이어 사육신의 참화에 한번 돌아선 우정은 차디찬 얼음이 되어 녹지를 않는다. 그때 그 정의는 어디로 가고 눈을 흘기는 엄혹한 냉기는 심연으로 끌어 내리고 있다. 인과응보에 따른 전율에 소름이 끼친다.

인륜에 벗어나고, 만고에 배신을 저지른 사람은 죽음 앞에서 넋이 나가고 몰골은 형해화(形骸化)된다. 그런데 죽은 사람은 저승에서 풀지 못한 원한이 맺혀 있으면 그 한을 이승에서 풀어 주라고 타이른다. 그래야만 삶과 죽음의 만나는 공간이 이루어지게 된다.

어이할꼬, 집현전에서 동료 수학하며 몸을 비비며 노닐던 그 벗들에게 너무나 몹씁짓을 했으니-. 그대들 가슴에 깊이 박혀 있는 통한을 어떻게 풀고, 죽음의 속박에서 조금이라도 위안을 받을 수는 영 없는 것일까?

신(神)의 품에서도 지상에서 살아 버티며 번뇌하고 발버둥 치며 괴로워하는 몰골을 불쌍히 여기며, 옛날의 영광은 오히려 죽음 앞에서 죄상의 연판장이 되어 죄어든다.

생목숨을 앗아간 넋, 분하고 억울하게 죽어간 넋, 원통하고 한되는 넋, 이 수많은 넋두리들로 시끄럽다.

앞이 점점 컴컴해지면서 스산한 느낌이 밀물처럼 밀려들고, 괴로운 심사는 시시각각으로 죄어든다. 내면의 독백에서 생존에 몸부림치며 양심의 가책과 죽음의 직면에서 고독의 지옥을 느끼며, 울부짖는 형상은 이 글의 본질인 읽는 이의 심연(深淵)에 신상필벌이 어떤 것인지 일깨워준다.

시가 시인의 가슴속에 용솟음쳐 목까지 치받아 올라오는 절박한 절규에서 낚아채듯이, 「고령탄」의 이 탄식조 음률은 지난날의 패악을 규탄하고, 뼈에 사무친 증오심이 징악(懲惡)의 이름으로 독자들의 가슴에 벼락같이 내리쳐 창끝처럼 꽂혀 단죄의 의분심을 불러일으킨다.

정령 인생이 끝내 여기 그치고 마는가? 뵈옵고 만나기가 어렵고도 어렵도다.

바라옵건데 세상에 신하된 사람들이어! 살아서 영달은 쉬어도, 인륜 배반의 허물은 죽어서도 영원히 남으니, 다시는 이런 통분할 일 없게 하소서.

배신자가 곡학 아세지도에 휩쓸리어 이승에서 풀지못한 삶의 회한을 남겼으니 사죄와 용서 사이에 빈틈없는 일치를 그려내기란 정말 어렵도다.

이 글은 세밀한 관찰과 표현을 통해 죽음을 앞두고 속세의 번뇌에서 벗어나려는 순간을 선비의 지성적 붓끝의 예봉은 날카로운 문채로 그려냈다. 세속의 명리에 너무 집착 말고 신념과 양심으로 정도를 밟아 다시는 이런 통탄할 일을 저지르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승에서 선과 악이란 심각한 애환의 대립에서 귀의코자 하며,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죄업에 따른 양식적 불안으로 인간의 내면적 고통에 몸부림치는 죄책과 심리적 갈등, 그리고 영혼까지 묘사하였다. <끝>

이준걸 前 국사편찬위원회 사서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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