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비밀스런 이야기...황동규 시인 `사는 기쁨’
  • 연합뉴스
노년의 비밀스런 이야기...황동규 시인 `사는 기쁨’
  • 연합뉴스
  • 승인 2013.02.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인 황동규(75)의 열다섯 번째 시집 `사는 기쁨’은 지나간 시간이 더 많을 때 당도하게 되는 어떤 문 앞에서 쓴 시다. 그 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 얼마간 여유가 있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지나온 긴 시간과 다가오는 짧은 시간을 그 문의 그늘에서 더듬게 된다. 그 문 뒤에 무엇이 있을지는 가늠하기 어렵고 아무도 말해주지 못한다. 문을 통과하고 난 이후 그 안쪽에 무엇이 남을지도 알 수 없다.
 “조만간 나도 내가 아닌 그 무엇이 되겠지./…내가 그만 내가 아닌 자리,/ 매에가로채인 토끼가 소리 없이 세상과 결별하는 풀밭처럼/ 아니면 모르는 새 말라버린 춘란 비워낸 화분처럼/ 마냥 허허로울까?/ 아니면 한동안 같이 살던 짐승 막 뜬 자리처럼/ 얼마 동안 가까운 이들의 마음에/ 무중력 냄새로 떠돌게 될까?/”(시 `무중력을 향하여’ 중)
 시인은 곳곳에 죽음의 문을 세우고 늙어가는 몸을 자각한다. 시력은 나빠지고 축대에서 떨어져 당기는 등은 정상으로 돌아오려면 몇 달이 걸린다. 먼저 건 전화지만 통화 중에 상대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죽음이 멀지 않았음은 사방에서 감지되지만 시인의 목소리는 다를 것이 없다. 몸에 발목 잡히지 않고 생각이 내달릴 수 있었던 것이 젊은 시절의 값 없는 축복이라면 삐걱이는 몸속에 생각이 숨을 죽이는 경험 역시 새로운 일이다. 노년 역시 스스로를 타이르고 견디는 일의 연속이겠지만 시인은 늙음에 가린 그 시절의 비밀스런이야기를 가만가만 일러준다.  “세월에 제대로 몸을 담궈 썩지 않고 삭는 곳에/ 아름다움과 기품이 담긴다지만/ 제대로 삭혀만 진다면/ 그런 후식(後食)은 없어도 좋으리./…슬픔도 기쁨도 어처구니없음도/ 생각 속에 구겨 넣었던 노기(怒氣)도/ 그냥 느낌들이 되어 마음의 가장자리 쪽으로 녹아 흐른다.”(시 `돌담길’ 중)
 “바위에 발톱 박은 나무들이 불길처럼 너울대자/ 부리 날카론 새들이 큰 소리로울부짖으며 몰려든다./ 느낌과 상상력을 비우고 마감하라는 삶의 끄트머리가/ 어찌 사납지 않으랴!/… 벗어나려다 벗어나려다 못 벗어난/ 벌레 문 자국같이 조그맣고 가려운 이 사는 기쁨/ 용서하시게.”(시 `사는 기쁨’ 중)
 1987년 미국 뉴욕대 객원교수로 브로드웨이를 걸었던 시인은 2009년 다시 그 길에 섰다. 마음속엔 힘겹게 옛 추억이 출몰한다. 이것이 필시 `삶의 마지막 브로드웨이 그냥 걷기’일거라 생각하면서 시인은 “내가 없는 미래가 갑자기 그리워지려 한다”고 고백한다.(시 `브로드웨이 걷기’ 중)
 소멸에 가까워지는 것은 쓸쓸한 일이지만 시인은 시집을 열며 짧게 적었다. `죽어서도 꿈꾸고 싶다’고.연합
 문학과지성사. 157쪽. 8000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기사
  • 경북 포항시 남구 중앙로 66-1번지 경북도민일보
  • 대표전화 : 054-283-8100
  • 팩스 : 054-283-5335
  • 청소년보호책임자 : 모용복 국장
  • 법인명 : 경북도민일보(주)
  • 제호 : 경북도민일보
  • 등록번호 : 경북 가 00003
  • 인터넷 등록번호 : 경북 아 00716
  • 등록일 : 2004-03-24
  • 발행일 : 2004-03-30
  • 발행인 : 박세환
  • 대표이사 : 김찬수
  • 경북도민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북도민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HiDominNews@hidomin.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