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간 나도 내가 아닌 그 무엇이 되겠지./…내가 그만 내가 아닌 자리,/ 매에가로채인 토끼가 소리 없이 세상과 결별하는 풀밭처럼/ 아니면 모르는 새 말라버린 춘란 비워낸 화분처럼/ 마냥 허허로울까?/ 아니면 한동안 같이 살던 짐승 막 뜬 자리처럼/ 얼마 동안 가까운 이들의 마음에/ 무중력 냄새로 떠돌게 될까?/”(시 `무중력을 향하여’ 중)
시인은 곳곳에 죽음의 문을 세우고 늙어가는 몸을 자각한다. 시력은 나빠지고 축대에서 떨어져 당기는 등은 정상으로 돌아오려면 몇 달이 걸린다. 먼저 건 전화지만 통화 중에 상대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죽음이 멀지 않았음은 사방에서 감지되지만 시인의 목소리는 다를 것이 없다. 몸에 발목 잡히지 않고 생각이 내달릴 수 있었던 것이 젊은 시절의 값 없는 축복이라면 삐걱이는 몸속에 생각이 숨을 죽이는 경험 역시 새로운 일이다. 노년 역시 스스로를 타이르고 견디는 일의 연속이겠지만 시인은 늙음에 가린 그 시절의 비밀스런이야기를 가만가만 일러준다. “세월에 제대로 몸을 담궈 썩지 않고 삭는 곳에/ 아름다움과 기품이 담긴다지만/ 제대로 삭혀만 진다면/ 그런 후식(後食)은 없어도 좋으리./…슬픔도 기쁨도 어처구니없음도/ 생각 속에 구겨 넣었던 노기(怒氣)도/ 그냥 느낌들이 되어 마음의 가장자리 쪽으로 녹아 흐른다.”(시 `돌담길’ 중)
“바위에 발톱 박은 나무들이 불길처럼 너울대자/ 부리 날카론 새들이 큰 소리로울부짖으며 몰려든다./ 느낌과 상상력을 비우고 마감하라는 삶의 끄트머리가/ 어찌 사납지 않으랴!/… 벗어나려다 벗어나려다 못 벗어난/ 벌레 문 자국같이 조그맣고 가려운 이 사는 기쁨/ 용서하시게.”(시 `사는 기쁨’ 중)
1987년 미국 뉴욕대 객원교수로 브로드웨이를 걸었던 시인은 2009년 다시 그 길에 섰다. 마음속엔 힘겹게 옛 추억이 출몰한다. 이것이 필시 `삶의 마지막 브로드웨이 그냥 걷기’일거라 생각하면서 시인은 “내가 없는 미래가 갑자기 그리워지려 한다”고 고백한다.(시 `브로드웨이 걷기’ 중)
소멸에 가까워지는 것은 쓸쓸한 일이지만 시인은 시집을 열며 짧게 적었다. `죽어서도 꿈꾸고 싶다’고.연합
문학과지성사. 157쪽.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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