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다순호 침몰, 미국 9·11과 한국의 세월호
  • 한동윤
중국의 다순호 침몰, 미국 9·11과 한국의 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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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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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향한`쌍욕’, 단식 없었던 미국·중국

[경북도민일보 = 한동윤] 조선일보에 소개된 1999년 중국 다순호(大舜號) 침몰 사건이다. 1999년 11월 24일 중국 옌타이(煙臺)-다롄(大連) 노선을 운항하는 여객선 다순호가 침몰했다. 다순호는 항구를 떠난 지 2시간 만에 7~10급의 바람을 만났다. 항해사가 급히 U턴을 시도했으나 선체가 직각으로 바람을 맞으면서 선박이 기울었다. 적재 트럭을 묶은 쇠사슬이 끊어지면서 트럭들이 부딪쳐 화재가 일어났고, 침몰했다. 이 사고로 선장·선원을 포함한 280명이 희생·실종됐다. 22명만이 생존했다.
 다순호가 가라앉기 시작하자 구조신호를 발사했고 1~2시간 후 구조선 2척이 현장에 도착했다. 구조선은 19척으로 늘어났지만 거센 바람과 파도 때문에 구조대는 반경 200여m 이내에 접근하지 못했다. 생존자 22명은 누구에게 구조된 게 아니라 해군이나 수영을 잘하는 사람들이었다. 수색작업은 실종자 28명을 남긴 채 며칠 만에 끝났다.
 다순호 사고는 세월호와 닮아도 너무 닮았다. 다순호도 일본에서 5년 동안 운행한 중고 여객선이었다. 길이 126m, 폭 20m, 높이 11.5m, 3층이며 제한 적재량은 2888t. 탑승자는 승객 262명, 선원 40명이었으며 적재량은 제한 규정을 월등히 초과했다. 날씨가 좋지 않아 옌타이 항구의 모든 선박이 출항하지 않았으나 다순호만 이윤을 쫓아 무리하게 출항했다. 청해진해운 유병언 일가의 탐욕(貪慾)을 닮았다.
 다순호 침몰 후 세월호와 똑같은 의문이 제기됐다. 현장에 접근할 만한 큰 배는 없었는가? 헬기는 왜 안 떴는가? 항구에서 불과 3㎞ 떨어진 곳에서 280명이나 죽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또한 왜 선장과 3명의 부기사가 모두 병급(3급)이었는가 하는 의문도 일었고 당연히 세월호처럼 국민들의 분노도 끓어 올랐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한국인들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농성이나 단식도 하지 않았고, 이혼한 뒤 돌보지 않던 딸이 죽었다고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광화문에 드러누워 대통령에게 쌍욕을 내뱉고, 야당 정치인은 그 옆에서 동조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야당이 국회를 방치하고 길거리로 쏟아져 나오지도 않았다.
 조선일보에 이 글을 실은 정인갑 베이징고려문화경제연구회 부회장 겸 사무총장은 다순호 참사 직후인 2000년 3월 5~15일 전인대회의 때 옌타이와 다롄의 인민대표가 다순호 사건을 들고 일어나 한바탕 화풀이를 하려고 했으나 다른 대표들이 `국난을 당하여 그러면 안된다’고 권고하는 바람에 “구조작업이 미흡했다”는 발언만 하고 자제했다고 소개했다. 정 총장은 “유가족이 들고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항거의 핑계와 근거가 없기 때문이며 다순호사건은 안전사고이지 권익침해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일본의 대지진 및 쓰나미 참사 때 일본정부의 대응책은 크게 미흡했다. 사망자만 수만명이었다. 그러나 일본 국민은 침착했다. 미국 역시 9·11테러 당시 미국 국민은 정부를 원망하며 공격하지 않았다. 대통령에 대한 비난은 당연히 없었다. 여당과 야당은 `우리는 같은 미국인’이라는 슬로건 아래 뭉쳤다.
 지난 8월 25일 미국 미주리주 퍼거슨시에서 비무장 상태로 백인 경관 총에 맞아 사망한 흑인 청년 마이클 브라운의 장례식이 세인트루이스시 침례교회에서 엄수됐다. 브라운의 아버지 마이클은 장례식 하루 전날 집회에서 “내일 아들을 영면에 들게 하는 동안 내가 원하는 것은 평화”라며 “이게 내가 원하는 전부”라고 말했다. 비무장 흑인청년을 살해한 경찰에 항의하는 흑인폭동이 일어난 가운데 마이클의 연설은 이내 그 폭동을 잠재웠다. 흑인 인권운동가인 알 샤프턴 목사도 “우리는 내일 마이클 브라운의 이름을 더럽히는 그 어떠한 행위도 원치 않는다”고 강조했다. 중국과 미국에는 `광화문 단식’도 대통령을 향한 `쌍욕’도 없었다. 더더구나 돌보지 않던 딸이 숨지자 단식투쟁으로 이목을 끈 `유민 아빠’도 없었고, `비상행동’을 내세운 도보행진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진상조사를 위한 법안에 두 차례나 합의하고도 유족들이 거부한다고 이를 뒤집어 엎고 유족들 앞에 무릎 꿇은 야당 지도자도 안 나왔고,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怨讐)”라고 국가원수를 모독한 국회의원도 나타나지 않았다. 중국·미국 국민과 우리나라 국민은 뭐가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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