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부조리 통렬히 비웃다
  • 이경관기자
세상의 부조리 통렬히 비웃다
  • 이경관기자
  • 승인 2015.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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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 작가 열세 번째 책이자 일곱 번째 소설집

 

소년은 늙지 않는다
김경욱 지음 l 문학과지성사 l 314쪽 l 1만3000원

[경북도민일보 = 이경관기자] 시계가 멈췄다. 초침이 움직이지 않자 우리의 세상도 멈췄다. 성장이 멎은 세계 속에서, 소년은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었다.
 “소년은 고막을 들쑤시는 날카로운 기계음에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 꿈이 달콤했던 건 아니었다. 언제나처럼 헐벗고 시린 꿈이었다. 꿈이 현실과 반대라는 말은 헛소리였다. 꿈은 추웠고 현실은 더 추웠다.”(‘소년은 늙지 않는다’ 107쪽)
 소년이 온다. 늙지 않는 소년이 뚜벅뚜벅 걸어 우리에게로 온다.
 1993년 등단 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 김경욱. 그의 열세 번째 책이자 일곱 번째 소설집인 ‘소년은 늙지 않는다’.
 이 책에는 2012년 이상문학상 후보로 올랐던 단편 ‘스프레이’를 비롯해 표제작 ‘소년은 늙지 않는다’ 등 총 9편의 단편소설이 담겨있다.
 “축축한 손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실수를 저지르면 아버지는 버럭 소리부터 질렀다. 넌 대체 뭐하는 놈이냐? 그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곤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축축한 놈.”(‘스프레이’ 10쪽)
 소설집의 시작을 알리는 단편 ‘스프레이’는 다한증을 앓고 있는 ‘그’의 이야기다. 왜곡된 시선으로 늘 정해진 시간을 살아가는 그는 어느 날 실수로 남의 택배를 가져오는 실수를 한다.
 그는 실수의 이유를 자신의 잠을 방해한 옆집 고양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막연한 복수를 꿈꾸고 옆집 여자를 관찰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타인의 택배를 뜯을 때의 희열을 잊지 못해 택배를 훔치기 시작한다.
 집착에 가까운 그의 행동은 현대사회의 왜곡된 시선을 되돌아보게 한다. 택배를 훔치고 옆집 여자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그의 행동은 타인과 진정으로 소통하지 못하고 떠 있는 섬같은 존재인 이 시대의 ‘개인’을 대변한다.
 “아버지는 나를 안아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신학대에 합격했을 때도, 첫 설교를 했을 때도 안아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장만한 구덩이는 나에겐 너무 컸다. 아니, 아버지가 장만한 구덩이에 비해 나는 너무 작았다. 만유인력의 반대말은 구덩이지만 구덩이의 반대말은 질투다. 질투는 열등감을 두 자로 줄인 것이고.”(‘빅브라더’ 100쪽)

 단편소설 ‘빅브라더’는 어린 시절 뭐든지 잘했고, 서커스단에서 인간대포를 맡음으로서 하늘로 날아올랐던 형이 ‘영웅’에서 거대한 ‘폐인’으로 추락하는 과정을 그렸다.
 이 소설은 진정 사랑받고 싶어 했던 미운오리새끼의 현대판 버전과 닮았다.
 “하지만 지나간 마흔여덟 번의 방학에 그러했듯 얼어 죽지도 굶어 죽지도 않을 것이다. 그럴 것이다. 엄마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눈이 녹고 꽃이 펴 엄마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그때까지는 할아버지가 죽는 일도 없으리라. 할아버지가 죽으면 아파트를 지킬 수 없을 테고 아파트를 지키지 못하면 눈이 녹고 꽃이 펴 엄마가 돌아와도 말짱 도루묵일 테니.”(‘소년은 늙지 않는다’ 134쪽)
 표제작 ‘소년은 늙지 않는다’는 빙하기의 도래로 눈 덮인 마을에 유기된 채 살아가는 소년의 이야기다.
 눈길을 헤치고 소년은 학교에 간다. 늘 그랬던 것처럼 제일 먼저 학교에 도착해 그곳에서 씻고 떨어진 담배꽁초를 줍는다. 점심으로 나온 음식은 아껴둔다. 수업을 마치곤 다시 집으로 돌아와 꽁꽁 언 옥상을 치우고 사람들이 떠난 빈 집을 찾아 땔감거리를 찾는다.
 소년의 곁을 지키는 것은 언제나 그 자리에 가만히 누워있는 할아버지뿐이다. 소년의 아빠는 차 사고로 죽고 엄마는 돈을 벌기 위해 바다를 건넜다. 소년은 할아버지에게 묻고 또 묻는다. ‘엄마는 언제 돌아와?’ 할아버지의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 ‘꽃이 피면. 눈이 녹고 꽃이 피면.’
 소년은 빈집의 장롱 속에 숨어 있는 아이를 발견한다. 아이는 새끼 늑대를 품고 있다. 소년은 아이를 데려와 먹이고 재운다. 소년은 자신이 목숨처럼 아껴온 호루라기를 선물한다.
 이 소설은 인간관계와 소외가 극에 달한 안티유토피아, 즉 디스토피아 소설로 소년은 합리적 질서가 붕괴된 채 멈춰선 세계와 그 속에 방치됐다. 언젠가 엄마가 돌아올 거라 믿는 소년은 마흔여덟 번의 방학을 보냈지만 여전히 소년이다.
 이번 소설집은 김 작가 특유의 현실의 냉혹하고 비정한 일을 감상에 빠지지 않고 간결한 문체로 전하는 ‘하드보일드’ 색체가 짙다. 기본권조차 보장되지 않는 극한의 환경이나 신뢰가 무너진 사회는 현대사회의 이면과 다르지 않다.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는 부조리한 사람들의 이야기. 김 작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세상의 부조리함을 통렬히 비웃는다. 
 소년이 온다. 멈춰선 시계가 다시금 달려가기를. 그 속에서 성장하지 않던 소년이 자라기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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