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 전성기 때 사역 범위, 지금보다 넓어”
  • 이희원기자
“부석사 전성기 때 사역 범위, 지금보다 넓어”
  • 이희원기자
  • 승인 2022.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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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주라청·통화 26년’ 등
글씨 새겨진 기와 발견 ‘눈길’
공간적 범위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 유물… 사역 범위 논의
관련 학술조사 시급성 제기
전성기 사역 보존 위해 사적 지정
정밀지표조사·발굴 등 이뤄져야
영주부석사 인근에서 발견된 주라청 기와.
영주부석사 인근에서 발견된 주라청 기와 탁본.

세계문화유산이자 화엄종찰 부석사의 전성기 사역은 어디까지였을까?

부석사 사역이 지금의 범위보다 훨씬 넓었음을 보여주는 ‘부석사 주라청’ 글씨가 새겨진 기와 등이 최근에 발견됐다. 송광사 성보박물관 학예실은 지난 25일 ‘부석사 사역 범위에 대한 논의와 학술조사의 시급성이 제기된다’고 밝혔다.

△부석사 공간적 범위

현재의 부석사는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봉황산 남쪽 산기슭에 무량수전을 중심으로 남북 축선을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다. 무량수전이 있는 북지리 148번지와 범종각, 천왕문 등의 구역과 동쪽으로는 봉황선원과 동부도전, 서쪽으로는 관음전과 화엄선원 및 서부도전, 북쪽에는 조사당, 자인당, 영산전 등의 전각과 시설들이 배치돼 있다.

그동안 부석사와 관련된 연구나 조사는 지금사역 범위에 국한돼 있지만 전하는 말에 따르면 ‘무량수전 동서 10리에 걸쳐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의 부석사 동쪽 석조여래좌상(보물 제 220호)이 있었던 북지리 179번지 일대는 한때 동방사지(東方寺址)로 불렸던 곳이다. 하지만 이곳은 ‘동방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 아니라 ‘부석사 동쪽에 있는 절터’라는 뜻이 잘못 인식돼 그렇게 불렸다.(임천,「영주 부석사 동방사지의 조사」, 『고고미술』2권 7호, 1961 참조)

예전부터 이곳 ‘傳동방사지’ 일대에서는 통일신라부터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기와들이 많이 확인되고 있는데 그중에 ‘천장방(天長房)’이 새겨진 명문 기와들이 집중적으로 발견돼 부석사 창건이후 고려말까지 중요한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곳에 자리한 석조여래좌상은(보물 제220호) 우리나라 최초의 삼신불(三身佛)이 봉안됐던 곳으로 미술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1958년 약식 조사 후 그대로 방치된 채 과수원으로 경작되면서 유적 훼손이 심각한 상황이다.

동쪽 폐사지의 경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동방사로 잘못 알려져 부석사와는 별개의 사찰로 취급돼 왔지만 최근 현 부석사 서쪽 지역에서 전성기 사역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 발견됐다.

지난해부터 부석사 서쪽 사역을 조사해온 건국대 건축전문대학원 이종원 교수가 수습해 부석사성보박물관에 전달한 많은 명문 기와들 가운데 ‘부석사 주라청(浮石寺 周羅廳)’, ‘통화 26년(統和二十六年, 1008년)’, ‘천흥(天興, 중국 금나라 애종 때의 연호, 1232~1234)’ 등이 새겨진 기와는 11~13세기의 것으로 부석사 전성기 때의 절의 공간적 범위를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 유물이다.

△주라청, 출가와 관련된 단어


이들 중 ‘부석사 주라청’ 명문기와는 고려초에 제작된 것으로 격자문 바탕에 글이 새겨져 있다. 주라청에 대한 문헌자료는 확인되지 않지만 ‘주라’는 처음 승려가 되려고 머리를 깎을 때 스승이 가장 나중에 깎아 주는 정수리의 머리카락을 의미하는 것으로 승려집단의 출가와 관련된 단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주라’용례는 1023년 조성된 합천 영암사 적연국사(寂然國師, 932~1014) 자광탑(慈光塔) 비문에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적연국사가 삭발한 뒤 그 머리카락을 따로 보관했다다는 ‘소락주라(所落周羅)’가 보인다. 또 1060년에 건립된 칠장사 혜소국사비(七長寺 慧炤國師碑)에도 국사가 광교사(光敎寺)에 가서 충회대사(忠會大師)를 은사로 해 정수리에 있는 주라(周羅)를 잘라 버리고(大師忠會頂落周羅)라는 비문도 있다.

또한 고려 문종의 장인이자 문신인 이자연 묘지명(李子淵 墓誌銘, 1061년)에는 그의 아들 가운데 다섯째 소현(韶顯)이 어려서 삭발 출가해 유가업(瑜伽業) 대선장(大選場)에 한 번에 급제해 대덕(大德)이 됐다는(韶顯少削周羅一捷于瑜伽業大選場為大徳) 내용에서도 주라가 확인된다. 또 복흥사 경덕국사묘지명(福興寺 景德國師墓誌銘, 1072년)에서도 국사가 스스로 머리를 깎았다(師自削周羅)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처럼 ‘주라’가 새겨진 기와는 상징성이 크고 부석사 사명(寺名)과 함께 이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된 곳은 지금의 사역 범위 밖으로 전성기 부석사 전체 사역에 대한 귀중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으며 학술발굴을 비롯한 정밀한 조사가 시급해 보인다.

△부석사 주변 발굴 시급

최근 영주시에서 발주한 ‘영주 부석사 관광지 조성사업부지’ 부석면 북지리 247번지 일대에서는 부석사 창건 전후 것으로 보이는 유구가 확인됐다. 아직까지 이곳에 대한 조사는 시굴 단계에 멈춰 있고, 현재는 그마저 중단된 상태다.

그동안 부석사 주변에 대한 개인적인 지표 조사 결과 조사당을 중심으로 남쪽 500m, 동쪽 1㎞, 서쪽 1.5㎞가량의 구역이 전성기 사역으로 추정된다. 특히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 석불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4호) 주변은 부석사 다비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원융국사비’에 국사의 다비를 부석사 동쪽 구릉에서 거행했다는(浮石寺 東崗 禮)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일련의 조사성과는 부석사가 국찰(國刹)로서의 규모와 화엄종찰로서의 성격을 규명해내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영주시 차원에서 이뤄진 부석사 주변 발굴은 이제 국가적인 사업으로 확대해 나가야 한다는 대의명분을 제공하기 충분하다.

이에 따라 농지경작과 관광지 개발 사업으로 인해 훼손되고 있는 부석사 전성기 사역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사적 지정과 함께 정밀지표조사는 물론 그 결과에 따른 발굴 등이 이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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