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냄새 그윽한 지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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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냄새 그윽한 지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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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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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끈한 국밥은 든든한 한 끼다. 동네에 꽤 오래된 국밥집이 문을 닫고 그 자리에 새 국밥집이 생겼다. 돼지국밥과 순대국밥, 수육이 주메뉴이다. 몇몇 국밥집은 누린내가 심해 선뜻 들어가기가 꺼려지는데, 건물 외관과 식당도 깔끔한 데다 돼지고기 특유의 냄새조차 없어 혼자라는 느낌이 드는 날 가끔 들린다. 순대국밥에 부추와 새우젓으로 간 맞춘 게 다인데, 나이 들어서 알게 된 시원 칼칼한 겨울 별미다.

국밥은 소나 돼지 뼈를 삶아 진하게 우려낸 국물에 밥을 말아 먹는 음식이다. 돼지고기, 쇠고기, 선지, 굴, 시래기, 콩나물 등으로 먼저 국을 끓이고 거기에 밥을 말면 국밥이 된다. 그래서 돼지국밥, 순대국밥, 콩나물국밥처럼 재료의 국에 밥이 얹힌다. 국과 밥이 한 그릇에 담겨있는 것이 국밥이다. 육수에 주로 고기나 부산물, 양념장과 새우젓으로 간을 하고 식성에 따라 들깻가루나 부추를 넣어 먹기도 한다. 반찬으로 배추김치나 깍두기가 곁들여 나오기도 하는데 주인의 인심과 손맛이 함께 버무려져 있다.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 드라마에서 종종 주막에서 국밥 먹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문헌에는 조선 후기 이후에나 등장한다. 국밥의 유래는 한국전쟁 중 피난길에 쉽게 구할 수 있는 돼지의 부산물로 국을 끓인 데다 밥을 말아 간편하게 먹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국밥집의 메뉴 중에 생소한 따로국밥이 있다. 어느 양반이 6.25 전쟁 피난길에 반상의 구분을 원한다고 하여 국 따로 밥 따로 시켜 먹은 데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국 뚝배기와 밥그릇을 따로 써야 했으니, 여러모로 설거지며 손이 더 갔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따로국밥이 국밥보다 비싸다. 난리 통에도 겉치레를 중시했던 양반들의 거드름이 만들어놓은 메뉴인 셈이다.

삼십여 년 전 초여름쯤이었던가, 그땐 토요일에도 정상 출근을 했던 시절이었다. 반나절 일하고 퇴근할 무렵이면 시장기가 돌았다.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았던 때라 토요일마다 시댁에 불려 가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후덥지근한 기운과 함께 허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시어머니는 국밥으로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경상도에선 국밥을 밥국이라고도 한다. 식구들은 많고 끼니가 부족할 때 양을 늘리기 위해 멀건 멸치육수에다 시래기며 묵은지, 식은밥 등을 한솥에 넣고 푹 끓여내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찌그러지고 색이 바랠 대로 바랜 양은 냄비에 여러 가지 재료가 들어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머리와 내장이 통째로 불은 손가락만 한 멸치, 무시래기와 묵은지, 거기에다 활화산처럼 허연 김 속에 식은밥과 잔치국수 가락이 퍼질 대로 퍼져 널브러져 있었다. 죽이라 하기에도 밥이라 하기도 애매한 괴기한 음식이었다. 시어머니와 남편, 시누이들은 콧등에 땀이 송골송골 돋는지도 모르고 맛있게 먹는데, 나는 도저히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보는 것만으로 비위가 거슬려 속이 울렁거렸다. 영락없는 바둑이 밥이었다. 그날 나는 종일 쫄쫄 굶었다.

나이가 뒷배 삼는다고 하지 않던가. 근래 들면서 그다지 못 먹거나 가리는 음식이 없어졌다. 꿈틀거리는 낙지며 쿰쿰한 냄새로 몸서리쳤던 홍어도 곧잘 먹는다. 그뿐 아니다. 가끔 순대국밥이며 소머리국밥도 찾아다니며 먹기도 한다. 국밥이라 해서 밥을 국에 말아 주지는 않는다. 대개가 국 따로 밥 따로, 일명 따로국밥이다. 요즘 1인 가구가 늘면서 혼자 밥 먹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가끔 나도 홀로 여행할 때, 한정식이나 백반은 1인분을 주문하기가 민망하여 주로 햄버거 가게나 분식집을 찾은 적이 많았다. 한번은 칼국수 전문점을 찾았는데 출입문에 ‘2인 이상만 주문됩니다’라고 적혀있어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러나 국밥은 언제라도 눈치 안 보고 한 그릇도 주문해 허기를 때울 수 있어, 나에게는 편한 지기처럼 고맙고 따뜻한 음식이다.


몇 해 전 만해마을에 가족여행을 간 적이 있다. 강원도 인제군 내린천을 끼고 있는 근방은 온마을 전체가 명태덕장이었다. 자연경관이 깨끗한 데다 얼음장 같은 겨울바람에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환골탈태한 명태, 맘껏 몸값 부풀린 게 황태다. 잘 마른 황태를 잘근잘근 두들겨 찢어 들기름에 달달 덖어 국물을 잡고, 뽀얗게 우려진 황태 국물에 무와 콩나물을 넣어 한소끔 더 끓이면 황탯국이 된다. 거기에 흰쌀밥과 곁다리 밑반찬이 용대리의 황태국밥이다. 쨍하게 찬 강원도의 아침, 전날의 해장을 위한 술꾼인 남편은 물론이고 나와 아이들도 익숙한 일상처럼 군말 없이 국밥 한 그릇씩을 뚝딱 비웠다.

국밥은 우리나라 대표 음식 중 하나로 대중의 인지도가 높고 역사도 깊다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문헌에 ‘얇게 썰어 조린 쇠고기를 장국에 말은 밥 위에 얹어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설은 조선 시대 임금이 농가가 잘되기를 바라는 제사를 지내고, 노동자들을 위해 고깃국을 내놓은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국밥은 우리 조상들이 예전부터 즐겨 먹었던 게 아닐까 싶다.

국밥은 향신료를 강하게 쓰거나 그 맛이 독선적이지 않다. 서양의 다른 요리들처럼 저만의 색과 향을 드러내는 사치스러움이 없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다. ‘검이불루‘儉而不陋’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음식이다. 하나 특출할 게 없는 재료들이 어우러져 잡내 없이 깊고 담백한 국밥. 나는 언제쯤 다른 사람들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보듬으며 담담한 삶의 깊은 맛을 우려낼 수 있을까.

어둠이 일찍 내려앉은 저녁, 오래 뭉근히 끓여 깊게 우려진 국밥 한 그릇에 반세기 넘게 소박한 동심원을 새기며 함께 걸어온 지기知己가 겹쳐진다. 구수한 진국이다.

김지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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