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탄생·본질 등 시대별·문화권별로 쉽게 풀어내
“건축, 시대의 지배담론에 순응하며 사회의 제도 담아”
새는 나뭇가지를 엮어 집을 짓는다. 곤충도 그러하다. 하지만 지능이 높고 복잡한 사회생활을 한다는 영장류는 집을 짓지 않는다.
인간만 빼놓고 말이다.
왜 인간은 영장류 중 유일하게 집을 지을까? 건축 연구자 서윤영 씨는 `출산과 양육’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임신기간이 유달리 길고 신생아가 미숙한 상태에서 태어나며 성체로 키워내기 위한 양육기간이 매우 길어 집을 지을 수밖에 없다는 거다.
새와 곤충이 집을 짓는 이유도 출산과 양육 때문이다. 둘 다 하늘을 난다는 게 가장 큰 특징. 따라서 몸을 가볍게 해야 하고, 이를 위해 체외수정은 불가피하다. 수정란을 알의 형태로 배출하므로 외부에서 부화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집은 확대된 자궁이다. 인간 역시 미숙아 상태로 아이를 낳아 장기간 집중관리를 해야 해 새와 곤충처럼 집이 필요하다. 그래서 구석기 시대부터 집을 지었고 지금도 형태는 비록 다양하지만 근본적 존재 이유는 마찬가지다.
서씨의 저서 `사람을 닮은 집, 세상을 담은 집’은 읽는 맛이 제법 쏠쏠하다. 알찬 내용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어서일 것이다. 너나없이 사는 집이지만 “참 모르고 살았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단숨에 읽히는 이유다.
서씨는 집을 짓고 산다. 여기서 말하는 집은 글로 짓는 집을 말한다. 건축 담론에 깊은 관심을 둬온 그는 그동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 `우리가 살아온 집,우리가 살아갈 집’ `건축, 권력과 욕망을 말하다’ 등 집에 관한 책을 여러 권 내왔다.
저자는 집의 탄생과 본질 등에 대해 시대별·문화권별로 쉽게 풀어낸다. 그리고 집이 말하는 담론을 이야기식으로 들려준다. 삶의 보금자리이면서도 막상 잘 모르는게 집. 그 정체를 하나하나 벗겨 내 상식을 늘려나가는 맛이 여간 짜릿하지 않다.
예컨대 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게 부엌이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불이고, 그 불이 있는 장소인 부엌은 집 안에서 가장 본질적인 공간이다. 호텔이 아무리 훌륭하게 꾸며져도 집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부엌이 없어서란다. 취사와 난방의 기능을 동시에 갖고 있던 부엌의 변천사와 지배담론도 재미있다.
마루와 마당도 집에서 아주 중요한 장소다. `산마루’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마루는 `높다’라는 뜻을 지닌다. 역시 `높다’는 의미인 `머리’와 어원이 같다. `맏+앙’이 본디 어원인 마당도 마찬가지. `맏아들’ `맏딸’ 등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으뜸’ `큰’이라는 뜻이며, `앙’은 장소를 나타내는 접미사다.
하지만 현대의 도시건물들은 그 중요장소들이 사라지거나 축소됐다. 극히 일부의 상류층을 제외하고는 이런 건축적 본질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다. 마루와 마당은 여행지 고가나 고향집에서나 잠시 느껴보는 정도. 아파트 시대에 마당을 구태여 찾자면 베란다 정도라고나 할까?
건축의 역사는 곧 체제 순응의 역사였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건축이 그 시대의 지배담론에 충실히 순응하며 그 사회의 제도를 담을 수 있는 건축물을 양산하고 또한 기득권 세력을 더욱 확대 재생산하는 데 충실히 기여한다는 것이다.
우리 일상의 모습을 기존의 사회체제 안에 순치시키려는 의도를 지닌 게 건축이라면 씁쓸해지기도 하다. 절반 이상의 한국인이 사는 아파트의 경우 중산층 편입과 동일시되면서 끊임없이 가족주의를 부추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노동자는 자신이 노동자임을 잊고 더욱 작은 가족단위로 분열된다. 저자는 “아파트는 지금 우리의 생활을 안정시키면서 옥죄고 있다”고 말한다.
서해문집. 308쪽. 1만1900원.
▶ 디지털 뉴스콘텐츠 이용규칙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