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 못다 한 노래 실컷 부르니 요즘 살맛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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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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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이틀간 `사인 사색’ 공연 앞두고 맹연습 중인 울릉 주민 이장희를 만나다
▲ 오늘부터 이틀간 서울 종로구 세종로 세종문화회관에서 송창식, 최백호, 한영애와 함께 `낭만콘서트 사인사색(四人思色)’공연을 펼치는 가수 이장희.연합

 2년 전 “1975년 중단하며 못다한 노래를 이제 불러볼까 한다”던 이장희는 그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최근 강남구 삼성동의 한 연습실. 자택이 있는 울릉도에서 며칠 전 상경한 이장희는 요즘 이곳에서 하루 두 시간씩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그는 오늘부터 이틀간 종로구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송창식, 최백호, 한영애와 함께 `낭만콘서트 사인사색(四人思色)’ 공연을 앞두고 있다.
 “노인네가 좋아하는 노래를 실컷 부르니 생애 최고의 해죠. 노래를 부르면 젊은날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왜 손을 뗐나 싶어요. 하하하.”
 유유자적 노래하는 듯 보이지만 그는 올해 못다 한 노래를 부지런히 불렀다. 지난 3월부터 서울, 부산, 대구 등지를 돌며 생애 첫 투어 콘서트를 했다.
 변변한 공연을 해본 기억이 거의 없다. 무명 시절 라이브 음악 감상실 오비스 캐빈에서 1년 반 동안 하우스 밴드와 노래했고 1972년 드라마센터에서 데뷔 콘서트를 했다. 1974년 `별들의 고향’ OST(오리지널사운드트랙) 앨범을 내고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공연한 게 마지막이었다.
 그는 “중학교 때 (조)영남이 형님이 우리집 툇마루에서 노래하는 걸 보고 `근사하다’는 생각에 기타를 치며 노래하기 시작했다”며 “전국투어를 통한 소득이 있었다면 중고교 때 공부도 팽개치고 그토록 좋아했던 음악을 다시 찾은 것이었다. 노래하는 게 정말 즐겁다”고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쏟아냈다.
 이장희의 초기 가수 활동은 그만큼 짧았다. 1971년 인기 DJ 이종환의 권유로 1집 `겨울이야기’를 내고 스타가 된 지 4년 만인 1975년 대마초 파동에 연루되며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구치소에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그는 “이 시련을 계기로 완전히 다른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후 의류 매장을 운영하며 돈을 벌었지만 1970년대 후반에는 작곡과 음반 제작에 손을 댔다. 김현식의 데뷔 음반을 비롯해 김수철, 김태화, 들국화의 최성원, 쉼(한상원, 정원영 등) 등의 음반을 제작하며 `이장희 사단’을 이뤘다.
 1980년 김태화가 부른 `바보처럼 살았군요’가 캐나다에서 열린 `태평양가요제’에 초청받아 제작자로 참석한 길에 그는 미국 뉴욕에 들렀다. 뉴욕에 내린 순간 미국에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1980년대 초 미국으로 건너가 레스토랑을 운영한 그는 1988년 라디오코리아를 설립해 1989년 1월 첫 방송을 했다. 라디오코리아는 1992년 흑인들의 로스앤젤레스(LA) 폭동 당시 교민들을 구조하는 상황실 역할을 하며 성장했다. 그러나 2003년 전파를 임대한 중국계 방송이 전파료 인상을 요구하자 방송국 문을 닫고 귀국해 2006년 울릉도에 터를 잡았다.
 그는 “인생은 순간의 선택의 연속”이라며 “노래를 그만둘 때는 그게 대세였고 대학(연세대)도 졸업 안 했으니 장사밖에 할 게 없었다. 미국에서는 살려고 음식점을 하고 방송국을 경영했다. 은퇴를 결심하고 하와이에 살려고 땅과 집을 알아봤는데 우연히 울릉도를 경험하고 너무 아름다워 농가 딸린 농토에 터를 잡았다. 모든 게 내 선택으로 자연스럽게 굴러 간 셈”이라고 설명했다.

 미련없이 직책을 버리고 낙향한 도연명처럼 그는 자신의 터전에 `울릉 천국’이라고 이름 짓고 은퇴 후의 삶을 영위했다. 2011년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등의 세시봉 동료들과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며 젊은 날의 자신을 찾았다. 같은 해 약 30년 만에 만든 신곡인 `울릉도는 나의 천국’도 발표했다.
 그는 지금은 농사를 포기하고 자택 인근 땅을 정원으로 꾸몄다. 내년 상반기에는 주거지를 뺀 1만2000 평의 땅을 기부해 경상북도와 손잡고 테마 공간을 만든다는 계획도 공개했다.
 “경상북도에서 제 집 `울릉 천국’에 테마 공원을 만들어요. 세시봉 친구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뮤지엄 같은 곳이죠. 극장도 짓고, 차를 마시는 카페, 전시회장 등을 갖춰요. 내년 상반기에는 주로 그 일을 하니 복 받은 노인네죠. 하하.”
 그러나 방랑의 기질은 여전하다. 지난 7-8월에는 경상북도에서 조직한 실크로드탐험대와 함께 50일간 자동차를 타고 2만㎞를 달리는 대장정을 했다. 이달에도 미국데스 밸리로 여행을 떠나려 했으나 이번 공연이 발목을 잡았다.
 이 무대에서 그는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한잔의 추억’, `그건 너’, `내 나이 육십하고 하나일 때’ 등의 대표곡을 부른다. 그리고 지난 9월 별세한 소설가 최인호를 기리기 위해 `안녕’을 선곡할 생각이라고 했다.
 최인호는 그의 고교·대학교 선배로 막역한 사이였다.
 “제가 이대 대강당에서 공연할 때 일간지에 콘서트 기사를 한 면에 써준 게 인호 형이었어요. 1980년대 제가 미국에서 별 볼일 없을 때도 중고차 한 대를 사서 그랜드캐니언, 라스베이거스, 데스 밸리 등지로 한 달간 함께 여행다녔죠. 형이 여행 후 귀국해 그걸 모티브로 ’깊고 푸른 밤`을 써서 이상문학상을 받았어요. 1년 후배창호 감독이 영화를 찍었고요. 인호 형 빈소에서 배창호 감독을 만나 두런두런 옛 얘기를 나눴네요.”
 “내 나이가 이제 사람을 떠나보내는 나이가 됐나 보다”는 그는 앞서 지난 2월 술 친구인 `한국 추상화의 대가’ 이두식 홍익대 회화과 교수도 떠나보냈다.
 그는 “두식이는 교수로 자기 일 다 해놓고 기분 좋게 소주 한잔 걸치고 집에 들어가서 고통 없이 떠났으니 그나마 다행인 죽음”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2년여 간 들뜬 생활을 했다는 그는 “공연이 끝나면 다시 나로 돌아가기 위해 몇개월 간 데스 밸리로 떠나 별을 보며 살 계획”이라고 했다. 매일 노래 연습을 하며 인생을 음악으로 채운 송창식과는 여전히 다른 행보다.
 그는 “세시봉 시절 창식이에게 `넌 언제까지 노래할 것 같냐’고 묻자 “죽을때까지 할거라”고 하더라. 난 그저 노래가 좋아서 했을 뿐이니 지금도 매일 연습하고 성스럽게 노래하는 창식이가 존경스럽다. 창식이는 노래 안 하면 상상이 안 된다. 친구지만 자랑스럽고 특별한 친구”라고 말했다.  2년 전 하나의 문화 현상을 만들어낸 세시봉 열풍이 다시 잠잠해졌다.
 “어떻게 장미가 늘 피어 있나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 자연스러운 거죠. 전 이제 자연스러운 게 좋아요. 제 나이에 맞게 화나면 화나는 데로 즐거우면 즐거운 데로 맺힌 데 없이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잊히고 사그라지는 건 자연의 섭리니까요.”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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