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도민일보 = 이경관기자]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는 “좋은 책을 읽는 것은 과거 몇 세기의 가장 훌륭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작가들은 그 자체로 한권의 특별한 책이다.
경북·대구에는 작가들의 삶과 문학적 세계를 만나볼 수 있는 문학관이 여럿 있다.
삶의 지혜를 찾아 지역 곳곳에 자리 잡은 문학관을 둘러보자.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서서/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이육사 ‘교목’ 전문)
민족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육사.
그의 치열했던 삶과 문학세계,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만나볼 수 있는 ‘이육사 문학관’.
문학관은 도산서원과 퇴계종택을 지나 자리한 육사의 고향 원촌(遠村)마을의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안동터미널에서 안동대 방면 1번 버스를 탄 뒤 교보생명 정류장에서 하차해 백운지 방면 67번 버스를 타고 원원천·이육사문학관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된다.
터미널에서 버스만 2시간 넘게 타는 먼 여정이다.
이육사 문학관은 일제 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17번의 옥살이와 문학으로 일제에 저항한 항일 민족시인 이육사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한 공간으로 육사 탄신 100주년이 되는 2004년에 세워졌다.
지난해 안동시 3대 문화권 사업으로 추진한 ‘유림문학 유토피아 조성사업’으로 신·증축됐다.
△ 수감번호 264 ‘이육사의 생애’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안동군 도산면 원천동 881번지에서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태어났다.
보문의숙을 거쳐 도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1921년 결혼 후, 백학학원에서 수학하고 9개월간 교편을 잡았다.
1924년 4월 일본으로 유학했다가 관동대지진을 겪은 후 귀국해 대구에서 조양회관을 중심으로 문화활동을 벌였다.
1926년부터 중국 북경 등지에서 유월한국혁명동지회에 참가해 조직활동을 펼쳤다.
1927년 여름에 조재만과 동행해 귀국했으나 장진홍 의거에 연루돼 대구형무소에서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뤘다.
그 때 수인번호 이육사(二六四)를 따서 호를 ‘육사(陸史)’로 지었다.
1930년 중외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첫 시 ‘말’을 발표했고 이후 ‘황혼’, ‘청포도’, ‘절정’, ‘광야’, ‘꽃’ 등 39편의 시를 남겼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일제에 항거한 시인으로 목가적이면서도 강인한 필치로 민족의지를 노래했다.
이듬해 북경과 남경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을 하다 의열단에서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1기생으로 입교해 6개월 과정을 마쳤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했으며 6월 체포돼 북경으로 압송됐다.
1944년 1월 16일 마흔의 나이에 북경주재 일본 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했다.
동지이자 친척인 이병희가 시신을 거둬 화장하고, 동생 원창에게 유골 인계했다.
미아리 묘지에 안장됐다가 1960년에 고향 원촌 뒷산으로 이장했다.
△ 광야에서 부르리라 ‘이육사와 독립운동’
육사는 친가와 외가에서 익힌 항일민족정신을 바탕으로 자연스레 독립운동의 대열에 참여하게 됐다.
1927년 10월 18일 항일지사 장진홍은 조선은행 대구지점을 폭발물로 공격했고 이에 연루돼 육사를 비롯해 원기, 원일, 원조 등 4형제가 함께 검거돼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뤘다.
이 때 수감번호인 264를 필명으로 사용하면서 본명 이원록보다 이육사로 알려지게 됐다.
감옥에서 나온 육사는 신문기자로서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중외일보 기자로 근무했다.
1930년 11월 일본을 규탄하는 격문이 나붙고 거리에 뿌려지는 ‘대구격문투쟁’이 벌어졌다. 육사가 배달원을 시켜 격문을 거리에 붙이게 한 것이었다.
1943년 육사는 국내의 항일 조직에 실질적 도움을 주고자 국내에 무기 반입을 시도했다.
그러던 중 그해 7월 모친과 형의 소상(小祥)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검거돼 1944년 북경의 한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육사는 일제의 의해 총 17번 검거돼 모진 고문과 수형 생활에 시달렸다.
△ 암흑 속에서 찬란히 빛났던 ‘이육사의 문학세계’
“온갖 고독이나 비애를 맛볼지라도 시 한편만 부끄럽지 않게 쓰면 될 것”
육사는 1930년대 일제의 무단 총독 정치가 극성을 떨 때 모국어를 부려서 쓰는 시인으로 문학활동에 나섰다.
그는 처음, 사물과 세계를 어두운 색조로 노래하면서 시, 소설, 수필, 평론 등 문학의 전 양식에 걸친 작품활동에 들어갔다. 특히 사회 비평을 병행하면서 대중을 계몽하려고 노력했다.
육사의 초기시는 서정적으로 인간과 세계를 노래했다. 그는 우리 주변의 여러사물을 제재로 시를 썼으며 때론 고향을 떠나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 본 이국정취를 시에 깔기도 했다.
이어 ‘황혼’, ‘교목’ 등에서는 침울한 정신세계를 추상적인 말로 노래하기도 했다.
“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이육사 ‘광야’ 전문)
육사는 일제 암흑기의 막바지에 이르러 ‘절정’, ‘광야’, ‘꽃’ 등을 통해 저항적 의지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시는 행동이며 진정한 의미의 참여였다.
그의 시는 일제식민치하라는 엄혹한 시대상과 이에 맞서는 한 인간의 내적 갈등, 그리고 이를 이겨내려는 강한 뜻이 담겨있다.
육사는 식민지적 압력에 대항하고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대륙을 전전하며 숱한 고난과 역경을 이겼고 이 과정을 시로 형상화함으로써 보다 진정한 저항의지를 보였다.
육사의 대표작으로 대변되는 ‘광야’는 광복 후인 1945년 12월 ‘자유신문’에 발표됐다.
시로 쓴 그의 유언인셈이다.
김학동 서강대 교수는 이육사의 문학에 대해 “그의 시작(詩作)을 위시한 일련의 작품들은 대륙을 내왕하면서 품었던 조국에 대한 무한한 향수, 아니면 조국 광복에 대한 애타는 정희의 체현일 것”이라고 말했다.
△ 민족 시인 육사를 만나보는 ‘이육사 문학관’
이육사 문학관은 크게 ‘문학정신관’과 ‘문학생활관’으로 구분할 수 있다.
문학정신관은 1층 전시관과 2층 전시관, 영상실, 사무실, 북카페, 3층 다목적홀, 세미나실, 강의실 등으로 구성돼있다.
전시실에는 이육사 선생의 육필 원고, 독립운동 자료, 시집, 사진 등의 전시물을 비롯해 조선혁명군사학교에서의 훈련과 감옥에서의 생활 모습 등을 재현한 모형이 있다.
딱딱한 전시품과 함께 영상이나 쉽게 설명한 전시 패널 등이 함께 전시돼 있어 아동 등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는다. 이육사의 생애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문학생활관은 1층 사무실, 식당, 세미나실, 2층 객실8실로 구성된다.
육사를 추모하는 다양한 문학행사가 열리는 만큼 전국에서 찾은 문인들과 관람객들이 하룻밤 묵고 갈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졌다.
문학관 주변에는 시 ‘절정’을 새긴 시비와 이육사의 동상이 있다.
문학관의 오른쪽에는 육사의 묘소로 가는 길이 있다. 2.8㎞의 오솔길로 족히 40분은 걸어야 하는 거리로 안동시는 현재 이 구간을 안전하게 정비하고 있다.
이위발 이육사 문학관 사무국장은 “이육사 선생은 40년의 짧은 삶 속에서도 문학과 독립운동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 조국과 민족을 향한 빛나는 정신을 심어줬다”며 “이육사 문학관은 육사 이원록 선생의 삶과 문학세계, 독립운동의 여정을 볼 수 있는 박물관이자 교육기관으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국의 감옥에서 죽는 순간까지 조국을 광복을 염원하며 눈도 제대로 감지 못했던 이육사.
육사가 기다렸던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은 이미 다녀갔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또 다른 의미의 초인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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