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기타, 그리고 프렌치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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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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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웰치의 ‘FRENCH KISS’들으며
▲ 오성은 작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경북도민일보]  △시가를 문 그를 유혹하는 그녀
 주름 없이 통이 넓은 하얀 바지와 검정색 브이넥 셔츠를 입은 남자의 이름은 밥 웰치. 움푹 파인 가슴라인 사이로 털이 수북이 피어올라 있다. 금빛 곱슬머리를 뒤로 넘긴 그의 도드라진 목젖과 날카로운 턱이 자신감을 증명하듯 당차 보인다. 보잉 선글라스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두 눈은 입에 문 시가의 끝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는 윗니로 살짝 깨문 갈색 시가에 성냥을 가져다 대며 불을 붙이고 있다. 그의 곁에 한 여자가 서 있다. 골반까지 찢어진 붉은 원피스에 그녀의 맨다리와 엉덩이가 드러난다. 매끈한 다리는 탱고의 동작처럼 접혀 있고, 붉게 칠한 매니큐어의 손톱은 그의 가슴 위에 살며시 올려져있다. 그녀는 그에게 완벽하게 기대어 있다. 붉은 브로치로 고정한 곱게 땋은 머리, 선명한 이목구비, 짙은 눈썹, 매혹하듯 내미는 딸기처럼 통통하고 붉은 혀. 혀끝이 그의 볼에 닿아 있다. 그녀는 과연 누구이기에 시가에 불을 붙이는 밥 웰치를 유혹하고 있는가.

 △밥 웰치와 검은 눈동자
 세상 누구도 그를 구속할 수 없을 것만 같다. 밥 웰치는 파라마운트의 영화 제작자이자 극작가인 아버지와 영화 ‘시민케인’의 감독인 오손 웰스가 운영하는 머큐리 극장의 전속 배우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명문 UCLA의 프랑스어학과에서 수학하며 밤에는 재즈클럽을 전전하던 그는 파리의 소르본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기도 하지만 아주 잠시 동안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플리트우드 맥(Fleetwood Mac)’의 기타리스트와 보컬을 거쳐 ‘파리스(Paris)’의 멤버로 활동한다. 마침내 1977년 9월, 밥 웰치는 자신의 솔로 데뷔 음반 ‘French Kiss’를 제작한다. 안정적인 멜로디, 반복되는 훅, 감각적인 가사들이 인상적인 앨범이다. 톤이 높은 기타 소리에 일순간 귀가 쫑긋 한다. 목소리에 꾸밈이 없고 어둡거나 수줍은 기색도 없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밥 웰치의 자신감을 엿볼 수 있다.

 밥 웰치를 아는 사람은 드물어도 최헌과 혜은이가 부른 ‘검은 눈동자’라는 곡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검은 눈동자’는 1977년 발표되어 미국 빌보드 차트 14위에 오른 밥 웰치의 ‘Ebony eyes’를 번안한 곡이다. 한 여자의 검은 눈동자에서 비밀스러운 정열을 엿본 남자가 타오르는 기분을 주체하지 못해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갈 것이라고 노래한다. 한밤중에 숲속을 거니는 고양이처럼 슬그머니. 그런데 앨범 표지는 전혀 반대다. 그녀가 그를 유혹하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그는 그녀에게 유혹당하는 꿈을 꾸고 있는 중일까.

 △시가, 기타, 그리고 프렌치 키스
 이 앨범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Sentimetal Lady’이다. 사실 이 곡의 뮤직비디오는 인위적인 연극처럼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그는 노래를 부르다 간주가 나오면 식당에 앉아있는 여자에게 다가가 진한 키스를 퍼붓는다. 노래를 부르다 말고 시가를 피우기도 한다. 그는 시가를 태우는 걸 멈추지 않는다. 그는 곰 인형을 주워들기도 하고 장난감처럼 생긴 권총을 손에 쥐기도 한다. 그를 둘러싼 여자들이 성냥과 라이터로 그의 시가를 향해 불을 붙여준다. 그는 연기를 내뱉고, 다시 시가를 입에 문다. “Sentimental gentle wind, Blowing through my life again, Sentimental Lady, Gentle one” 후렴구가 반복된다. 노래가 끝이 날 것처럼 사운드 볼륨이 점점 줄어든다. 그때 갑자기 밥 웰치를 둘러싼 여자들이 화들짝 놀란다. 그가 권총의 방아쇠를 아무런 감흥 없이 당겼기 때문이다. 장난감 총에서는 앙증맞은 깃발 하나가 튀어나온다. BANG이라고 적힌 붉은 깃발이다.
 2012년 11월, 밥 웰치는 지병으로 현저하게 무너진 몸과 우울증을 견디지 못했다. 그는 제 심장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고 만다. 65세의 그가 죽는 순간에 떠올린 장면은 무엇이었을까.
 매혹적인 이 LP커버의 뒷면에는 밥 웰치가 보이지 않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녀의 매끈한 허벅지만이 다시 한 번 등장할 뿐이다. 그녀가 신은 붉은 힐의 높은 굽이 보인다. 종아리의 미세한 근육이 드러난다. 붉은 드레스의 허리끈이 다리 위로 떨어져 있다. 하지만 앞표지와 달리 그녀의 얼굴은 이제 막 불길에 휩싸인 것처럼 노랗게 빛이 바라버렸다. 자신만만하게 시가를 물고 있던 밥 웰치는 온데간데없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는 기이하고 모호한 불길의 일렁임이 위태롭고 매혹적으로 타오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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