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동안
제가 처음으로 소설 비슷한 글을 쓴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제목은 ‘천일동안’이었고, 주인공은 물론 공장장님이었습니다. 일종의 팬픽이라고 해도 좋겠네요. 사실을 말하자면 저마다 소설이나 시를 써서 발표해야하는 과제의 일환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무적 투어의 환희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3시간이 넘는 스탠딩 콘서트를 경험한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 현장은 쉽사리 헤어 나오지 못할 세계라고 단언합니다. 그런 경험을 하기도 쉽지는 않은 일입니다만.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잖아요. 저는 친구 따라 드림 팩토리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밴드부의 리더였고, 기타를 쳤으며, 메탈리카야 말로 신이라고 떠받들고 있었습니다. 이승환은 그저 발라드 가수가 아니냐. 그렇게 반문을 하기도 했던 것 같아요. 친구는 CD플레이어를 재생하며 한쪽 이어폰을 제 귀에 꽂아두고는 발라드만 부르는 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믿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을 듣고 나서는 이어폰을 뿌리쳤죠. 나는 락커가 될 거란 말이다. 뭐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단 한 번의 콘서트가 저를 5cm 정도 비틀어놓았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1999년의 5cm는 이제 제가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뒤틀려 잘 감당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소설가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과도 비슷한 궤적이군요. 잘, 이 아니라 도무지 감당이 안 된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습니다.
-드림 팩토리
-야발라바히야
제가 곧잘 들리는 중고 LP상점에서 ‘The show’ 투어 앨범을 만난 건 몇 주 전입니다. 바이닐의 상태도 보지 않고 값을 치르려 하는데, 2장 중 1장이 사라지고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사장님은 격양되어 며칠 전만 해도 분명히 본인이 직접 확인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승환이는 두 장이 다 있었단 말이야, 언성을 높이기도 했어요. 손님 중 누군가 몰래 한 장을 빼어갔거나, 사장님의 실수로 다른 판에 들어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괜찮다고, 한 장이라도 구하겠다고 했습니다. 정말로 구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사장님은 팔지 않기로 결심해버렸습니다. 그 자리에서 이승환의 라이브 앨범을 팔지 않는 쪽으로 마음을 돌리신 겁니다.
그 반쪽짜리 앨범이 고독하게 중고 LP상점 안에 꽂혀 있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한때 동경한 스타를 기억하는 무심한 팬의 마음 상태에 대한 제유는 아닌가 하는 뜨끔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염려가 든다는 말을 당신은 1999년의 무대 위에서 했었거든요. 20년 후의 오성은은 삶에 찌든 빈곤한 소설가가 될 것이기에 이제 이승환 같은 음악은 사지도 듣지도 않을 거라는 걸 예감이라도 한 듯이 말입니다.
음악은 자꾸만 기억 속 저편의 시절을 여기로 불러들입니다. 어느 때고 찾아와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고, 다시 울리기도 합니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지만 영원하지 않은 것을 기억하는 방식들은 영원과 근접하게 남아 있을 수도 있다고 이따금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그 LP를 구하러 갈 방법을 모색하겠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아, 물론 합법적으로 말이죠. 여기 이 자리에서, 이런 제 마음을 고백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주문을 외워보는 일도 좋겠습니다만. 야발라바히야 야발라바히야. 한번 더 될 때까지…. 오성은 작가(동아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강사)
▶ 디지털 뉴스콘텐츠 이용규칙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