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장애인권리협약과 탈시설, 그리고 한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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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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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2010년대에 등장한 중요한 사회적 의제가 ‘장애인 탈시설’이다. 장애인 탈시설 의제가 등장하고 확산한 과정은 2000년대 이후 중증장애인의 사회적 등장을 알렸던 장애인 이동권 운동과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운동, 장애인 활동지원 서비스 제도화 운동, 장애인등급제 폐지 운동 등과 맞닿아 있다. 2009년부터 서울시를 시작으로 대구시, 부산시, 광주시 등 지방자치단체가 장애인 단체의 요구에 따라 시설 장애인의 인권 실태와 탈시설 의사를 조사했다. 2011년에는 ‘장애인활동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지자체 수준에서 시범사업으로 이뤄지던 활동지원 서비스가 전국 수준의 제도로 구축됐다. 2017년에는 장애인복지법 개정으로 기존의 장애등급제가 바뀌면서 좀 더 많은 이들이 장애인연금이나 활동지원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2019년에는 국가인권위원회가 탈시설 로드맵 마련을 중앙정부에 권고했고, 2020년에는 국회가 ‘탈시설지원법안’을 발의했으며, 2021년에는 정부가 탈시설 로드맵을 발표했다. 로드맵에 따라 정부는 2022년부터 탈시설 시범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요컨대 한국은 국가인권위원회 보고서에 ‘탈시설’이 명기된 2005년을 기준으로 보면 20년이 되지 않은 탈시설 전략 시행 초기 단계에 있는 국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경험을 국제적 맥락에 자리매김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탈시설 의제 형성 과정의 국제적 맥락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유엔의 9대 인권조약 중 8번째로 채택된 ‘장애인 권리에 관한 협약’(장애인권리협약)이다. 2006년에 채택된 장애인권리협약은 장애인을 복지 수혜자가 아닌 권리의 주체로 간주하고 장애인의 자율성과 참여, 자립생활 보장을 규정한다. 이러한 기조에서 장애인권리위원회는 일관되게 탈시설을 강조해왔다. 장애인권리협약 체결 전에도 탈시설의 규범적 근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래 유엔에서 채택된 여러 인권협약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국제적으로 장애인의 권리가 주목받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 유엔은 ‘정신지체인 권리선언’(1971년)이나 ‘장애인권리선언’(1975년)을 채택하고, ‘세계장애인의 해’(1981년)를 지정하고, ‘장애인 10년을 위한 세계행동계획’(1982년)을 발표하고, ‘장애인의 기회균등을 위한 표준규칙’(1993년)을 채택하는 등 꾸준히 노력해왔다. 그럼에도 별도의 협약이 채택된 것은 1980년대부터 지적되었던 여러 한계를 보완할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기존 노력은 장애인 권리 보장을 위한 구속력을 갖지 못한다는 점에서, 장애인의 권리를 제약하는 데 근거를 제공한 ‘장애 의료 모델’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형식적인 기회 균등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지적됐다.

장애인권리협약의 모든 조항이 탈시설과 관련 있지만 직접 관련 있는 조항은 ‘자립적 생활과 지역사회 포용’을 규정한 제19조다. 19조는 모든 장애인이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선택권을 가지고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며, 이들의 지역사회로의 완전한 통합 및 참여를 촉진할 의무를 당사국에 부여한다. 즉 “장애인은 다른 사람과 동등하게 자신의 거주지 및 동거인을 선택할 기회를 가지며, 특정한 주거 형태를 취할 것을 강요받지 아니한다.” 일각에서는 강요되어서는 안 될 “특정한 주거 형태”가 ‘탈시설’이라고, ‘시설’을 거주지로 ‘선택할 기회’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협약 전문과 관련 해석을 검토하면 위 문구는 명백하게 ‘탈시설’을 가리킨다.

장애인권리협약은 당사국의 협약 이행을 점검하기 위해 독립적인 전문가 18명으로 구성된 장애인권리위원회를 설치해 협약의 핵심 의미를 해석하고, 당사국들이 정기적으로(최초 2년 이내, 이후 4년마다) 제출하는 이행 보고서를 검토하며, 선택의정서에 근거한 개인 통보 제도 등을 통해 조직적인 협약 위반 사례를 조사한다.

장애인권리위원회는 협약의 주요 내용에 대한 해설서인 일반논평을 여덟 차례, 특정 사안에 대한 지침인 가이드라인을 다섯 차례 발표한 바 있다. 이 가운데 19조의 의미를 구체화한 것은 장애인권리위원회가 2017년에 발표한 일반논평 5호다. 여기서 장애인권리위원회는 ‘자립적 주거형태’가 ‘모든 유형의 거주시설 외부의 생활환경’이라는 점을 명시했다. 일반논평 5호는 2017년에 한국사회에서 ‘희망원 사태’가 등장했을 때에 이에 대한 대응 방향을 ‘탈시설’로 설정하는 데에 영향을 미쳤으며, 2019년에 국가인권위원회가 정부에 탈시설 로드맵 마련을 권고한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코로나 대유행은 탈시설 의제가 국제적으로 주목받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 장애인권리위원회는 2022년에 네 번째로 발표한 가이드라인(비상상황을 포함한 탈시설 가이드라인)을 통해 탈시설의 의의를 더욱 강조하고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했으며 각국 정부의 즉각적인 조치를 촉구했다. 탈시설 가이드라인은 한국에서 관련 법안 발의 및 협약 이행 수준 확인 지표 개발 연구 시도 등에 영향을 미쳤다.

장애인권리위원회는 당사국이 제출하는 정기 보고서에 대한 검토 의견인 ‘최종견해’를 통해서도 탈시설을 강조한다. 장애인권리위원회는 2014년과 2022년에 한국 정부에 전달한 최종견해에서 탈시설 정책 추진을 권고한 바 있다. 2014년 제1차 최종견해에서 장애인권리위원회는 탈시설 전략의 효율성 부족과 장애인의 지역사회 포용을 위한 충분한 조치 부재를 우려하면서 ‘장애 인권 모델에 기반한 효과적인 탈시설 전략 개발 및 지역사회 내 지원서비스 대폭 확대’를 권고했으며, 2022년 제2·3차 최종견해에서는 코로나 대유행 기간에 시설 수용 장애인이 사망한 것과 시설 수용이 지속되고 있는 것, 탈시설 전략 이행이 미흡한 것을 우려하면서 2021년에 한국 정부가 발표한 탈시설 로드맵을 개정하라고 권고했다.

장애인권리위원회는 ‘중대하고 조직적인 권리 침해 상황’에 대한 별도의 위원회 조사 결과를 통해서도 일관되게 탈시설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조사 사례는 세 건이다. 2017년에 영국이 조사받았고, 2018년에는 스페인이, 2020년에는 헝가리가 조사받았다. 영국은 복지 재정 긴축에 따라 장애인의 권리가 침해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스페인은 장애인을 특수교육으로 분리하고 배제한다는 이유로 조사받았다. 헝가리는 탈시설을 위한 지원금을 시설 소규모화 정책에 쓰고 있다는 이유로 조사받았다. 조사 결과는 제기된 우려를 상당 수준 확인하는 것이었으나 조사 대상 정부는 조사 결과의 상당 부분을 부인했다. 이들 사례는 ‘탈시설’을 비롯한 장애인 권리 보장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의제라는 점을, 사회경제적 상황과 정부의 태도에 따라 장애인 권리 보장 수준이 ‘퇴행’할 수도 있다는 점을 나타낸다. 이와 관련해 2022년 12월은 한국사회에서 새로운 계기가 된 시점으로 기록될만하다. 장애인권리협약 이행에 관한 감독 절차를 규정한 별도 문서인 선택의정서에 비준했기 때문이다. 비준 순서로는 101번째이고, 시점으로는 협약 비준 이래 16년 만이다. 2023년부터는 한국에서도 장애인권리위원회에 한국 정부의 협약 위반에 대한 조사(개인 통보·위원회 조사)를 요청할 수 있다.

탈시설 관련 국제 규범과 실천 사례는 탈시설 과정을 압축적으로 겪고 있는 한국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존에 여러 나라가 밟은 경로를 신중하게 검토해 중장기적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다. 동시에 가야 할 방향은 분명한 만큼 기존 국가 사례의 교훈을 적극적으로 해석해 과감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조치는 입법과 행정, 사법의 세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입법 조치로는 시설 폐쇄 및 시설 수용 장애인 탈시설 지원에 대한 국가 계획의 규범과 근거가 될 ‘시설폐쇄법’ 및 ‘탈시설지원법’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 행정 조치로는 시설 수용에 대해 국가가 사과하고 탈시설을 선언할 필요가 있다. 장애인권리협약 일반논평 5호와 탈시설 가이드라인 등에 기초해 탈시설 로드맵을 개정하고 독립성과 실질적 권한을 가진 국가 차원의 탈시설 조정기구를 설립해 탈시설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갈 필요가 있다. 사법 조치로는 장애인권리협약을 재판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시설 내 인권침해 및 사망 등의 사건을 특별한 사건으로 대하며, 시설 인권침해 예방을 위한 독립적 메커니즘을 사법부에 설치할 필요가 있다. 이들 조치 중 일부라도 2024년에 실현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상직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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