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배추와 반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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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배추와 반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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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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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워킹비자가 끝나기 몇 달 전부터 가보지 못했던 명소를 시간을 내서 찾아다녔다. 한국에 돌아가면 아마 다신 이곳에 오기 어려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던 와중에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가보았다. 많은 그림을 지나치다가 두꺼운 유리 보호막 안에 전시되고 있던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원화가 눈에 들어왔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매우 작게 느껴졌던 그림 속의 밤하늘 별들을 보면서 내 마음속에서는 작은 불꽃 같은 축포가 터지는 것 같았다.

고흐의 그림이 마음을 울리면서 다른 작품을 인터넷으로 찾아보게 되었다. 그는 우울증을 앓았고 자해를 하기도 했다. 부모님과 다투고 28세부터 유화를 배워가며 작품을 남겼다.

1881년 ‘양배추와 나막신이 있는 정물’이라는 그림도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먹는 흰 양배추와 나막신을 어두운 느낌의 유화로 표현했다. 이 그림은 그가 안톤 마우베(Anton Mauve)의 제자로 유화를 공부할 때 처음으로 기회를 얻어 흥분된 마음으로 그린 작품이다. 말라가는 흰 양배추의 겉면은 마치 평생 궁핍한 생활을 하던 그를 연상시킨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후 몇 달간 난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다.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에 있던 식자재, 도구 등 환경뿐 아니라 음식의 스타일도 한국에서 요구하는 것을 다시 배워가야 했다.

우울증에 살짝 빠질 때쯤 결단을 했다. 잠시 머물던 부모님 집에서 나와 반지하의 단칸방으로 옮겼다. 보증금으로 돈을 지불하고 나니 수중에 남은 돈이 없었고 다시 일을 찾아 나섰다.

일단 경기도에 있던 이태리식당에서 일을 시작했다. 장사가 잘되던 곳이라 많은 양의 음식을 해나가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면서 차츰 내 경력을 살릴 수 있는 레스토랑을 찾아 나섰다.

아직은 내가 배워야 할 것들이 있었다. 그릴을 더 많이 정교하게 배워야 했고, 한국 상황에 맞는 소스 만들기도 익히고 싶었다. 이런 판단이 들어 경험 많은 일본인 고바야시 셰프 밑으로 들어갔다. 고바야시 셰프는 평범한 재료의 배합으로 맛을 발견해 가는 것에 능하였다.

직원 식사에 나온 양배추쌈을 먹었던 것인지 그는 양배추와 돼지목살을 통으로 맥주에 삶아냈다. 여기에 맥주와 그린페퍼로 소스를 만든 찜 요리를 만들었다. 졸인 맥주의 달달한 맛에 그린페퍼의 향이 입혀지고 목살과 식감이 살아 있는 양배추가 일품이었다.

흔한 양배추 발견은 요즘에도 이어진다. 직장에서는 요즘 들어 자주 베트남 친구들이 고국 음식을 해 먹는다. 가게에 없는 재료는 출근을 하며 알아서 준비한다. 하루는 양배추와 미나리로 베트남식 물김치를 만들었다. 양배추 채를 썰고 미나리를 넣고 당근채도 약간 넣는다. 물을 넣고 식초, 소금, 설탕만으로 슴슴한 국물을 만들어 넣은 후 2일 정도 상온에 놓아두었다.

나중에 맛을 보여주었는데 슴슴한 물김치처럼 양배추 식감과 미나리 향이 잘 어울렸다. 슬슬 더워지기 시작하는 날씨에 먹기 좋은 야채 반찬이 되었다.

양배추로 만든 음식 중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있다면 코슬로이다. 마요네즈가 들어간 스타일과 마요네즈가 없는 방법이 있다. 페스트푸드 업체의 마요네즈가 들어간 것도 좋지만 식초와 설탕에 머스타드가루와 샐러리씨로 향을 낸 코슬로도 기억이 남는다.

미국에서 학교 친구들과 함께 소풍을 간 자리에서 한 친구가 이런 담백한 코슬로를 만들어 왔다. 이미 아이가 둘의 아버지였던 그가 만들어준 코슬로는 아이들에게 자주 만들어 주면서 실력이 늘었을 것 같았다.

음식은 누구나 매일 먹어야 하나 흔한 양배추라도 새롭게 만들면 색다른 반찬이 된다. 다만 과거의 방식만 고집하면 우리는 지겨운 양배추 음식이라는 틀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고흐의 스승인 안톤 마우베가 고흐에게 내민 주제는 양배추와 나막신 몇 알의 감자였다. 이 평범한 주제에 그는 각각의 재료가 지닌 다른 색과 질감을 표현하는 훈련의 기회로 삼았다고 한다.

평범한 재료로 기억에 남는 음식으로 변하는 양배추가 그런 면에서 꼭 맞는 재료가 아닌가 싶다.

우라는 매일 화려한 음식 사진에 열광하지만 그 안에는 그 맛을 떠받치는 평범한 재료들이 숨어 있다. 냉장고 속에 말라버린 양배추 속에는 언제나 신선하고 아삭한 속살이 살아있다. 고흐의 손길처럼 그 맛을 살려내 보는 건 어떨까?

전호제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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