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천은 서재를 꾸미는 것이 소원이라 돈만 생기면 상경하여 서점으로 찾아가는 도서 수집벽이 있었다. 이렇게 책을 모으기 10여 년에 집안 형세는 기울었으나 책은 늘어 장서 700여 책을 모으게 되었다. 한 때는 빚에 쪼들려 『주자강목』을 잡히고 돈을 빌려 썼다. 매천은 “고인(古人)은 말하되 장서 천권은 백(百)의 성을 거느린 왕이 부럽지 않다고 했는데, 과연 그 말이 믿어지며 나도 백의 성을 거느린 왕이 될 날이 멀지 않구나” 하였다. 과연 매천에게는 책이 밥이요, 글이 혼이었던 것이다. 그는 산사(散史 관직에 있지 않고 민간에 있어 문필에 종사하는 사람)로 여생을 보냈다.
# 1905년 을사늑약에 비분하여 중국에 망명하려 했으나 여비가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니 유시 4수를 남기고 음독 순절하였다. 그는 절명시에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정말 어렵다”고 절규했다. 그리고 지성인은 “세상이 잠든 밤에도 깨어 있는 사람이 지식인이라”고 하였다. 저서로 『매천집』·『동비기략』·『매천야록』을 남겼다.
# 동계 정온(1569~1642 거창인·대사간·대제학·이조참판)은 인조 때 명신으로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척화론을 적극 주장했으나, 다음해 화의가 성립돼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기 위해 성문을 나서는 순간 칼로 배를 갈랐다. 나라 잃은 이 험한 꼴, 내 눈으로 안보는 게 더 편하다며 자인(自刃)을 택했다. 68세의 그는 6cm 가량의 상처로 내장이 튀어 나온 것을 아들이 집어넣고 꿰맸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선비체면에 고향에 가지 않고, 전북 무주군에 있는 덕유산에 들어가면서 아들에게 “누가 찾거든 〈모리(某里 아무 곳)〉에 갔다고 전해라”했다. 모처로 떠난 그는 ‘어느 마을’로 숨어들었는지 영 돌아오지 못하고, 조정에서는 이조판서의 관위를 추증했다. 그 후 움집을 지어 살던 곳을 ‘모리’라 불렀다.
이준걸 前 국사편찬위원회 사서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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