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도민일보] ‘삼국유사’에는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낫는다. 가물 때는 비가 오고 바람이 멎고 파도가 가라앉는다. 그것이 바로 만파식적이라는 국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만파식적의 유래에 감포 앞바다의 대왕암과 문무왕이 등장한다.
문무왕이 돌아가신 바로 그 다음해 대왕암에선 기이한 일이 일어난다. 용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이 나타나 당시 왕인 신문왕에게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이라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만든 피리가 바로 만파식적이다. 이 설화가 등장하는 배경에 문무왕이 동해에 묻히길 원했던 진짜 이유가 숨어있다.
‘삼국유사’ ‘기이’편 ‘문호왕법민’조에는 “문무왕이 평소에 지의법사에게 자주 이르기를 죽은 뒤엔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겠노라 하였다.”고 전한다. 문무왕의 이런 생각은 감은사에서도 확인된다. 감은사의 금당 주춧돌 아래에는 일정한 틈이 있다. 원래 절간에 이런 공간은 필요 없을 뿐더러 마련한 예도 없단다. 다시 ‘삼국유사’ ‘만파식적’조를 살펴보자. “금당의 섬돌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 하나를 뚫어 두었는데 이것은 용이 절에 들어오게 하기 위한 것”이다. 동쪽으로 낸 이 구멍을 통해 용이 된 왕이 절간에 들어와 서리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감은사가 지어질 당시엔 바닷물이 절 앞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감은사지엔 지금도 그때의 선착장 흔적이 남아있다. 감은사 주변의 지형과 화석을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1300여 년 전에는 갈수기 때도 바닷물이 지금보다 110cm 높았고 강폭도 지금보다 수십 미터 더 넓었을 것이라고 한다. 하천의 제방은 나중에 축조된 것인데 수심이 110㎝ 높았다면 작은 배들이 충분히 뜰 수 있을 정도였다.
‘삼국유사’ ‘의해’편 ‘현유가해화엄’조에도 감은사 불전 앞까지 바닷물이 넘쳤다가 저녁에 물러갔다고 기록돼 있다.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또 다시 8년간 이 땅에서 당을 몰아내기 위해 전쟁을 치른 문무왕은 왕위에 오른 뒤 16년 만에 통일의 과업을 이룬다. 경주시 암곡동 동대봉산 깊숙한 골짜기의 무장사터는 경주시내에 있는 다른 화려한 절터와 달리 그리 크지 않다. 현재 이 절터엔 부서진 귀부와 탑만이 남아있다. 무장사라는 절이름은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이곳에 병기와 투구를 묻은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문무왕은 평생의 과업이던 통일국가를 지키기 위해 죽어서 용이 되길 원했고, 그의 아들 신문왕은 그 용이 머물 수 있도록 감은사를 지어 선왕의 유지를 잇는다. 그리고 백성들에게는 만파식적 설화가 회자된다. 해룡이 돼 감은사에 머문 문무왕이, 신문왕에게 신비의 피리 만파식적을 전해줬다는 것은 신문왕의 적통성을 확인시키며 중요한 통치기반이 된다. 신문왕이 왕권을 강화하고 새로운 문물을 정비하는 기초를 선왕인 문무왕이 닦아준 것이다. 이후 만파식적은 강력한 왕권의 상징물이 된다.
흔히 에밀레종으로 알려진 성덕대왕 신종 위엔 특이하게 용이 원통을 짊어진 형상이 보인다. 다른 시대의 종에는 보이지 않는 형태인데 상원사종에도 비슷한 모양의 원통이 새겨져 있다. 이것을 용이 된 문무왕과 만파식적을 상징한 것으로 삼국통일의 위업을 후대까지 부각시킨 흔적이라고 해석한 사람도 있다. 같은 맥락에서 경주 앞바다의 대왕암은 당시 신라인의 마음에 중요한 상징적 의미로 자리 잡는다.
신라인들은 용으로 화신한 문무왕이 이곳에 머물며 위기 때마다 나라를 지켜준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은 이후 신라사회를 지탱하는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한다. 평생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살다 마침내 통일의 과업을 이룩한 문무왕. 죽은 뒤에도 그 통일 국가가 유지되고 번영하길 바라는 대왕의 충정이 일찍이 유례가 없는 수중릉으로 조성된 것이다.
2015년 대한민국은 아직도 분단의 모진 수레바퀴에 걸려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1300년이 훌쩍 넘은 대왕암은 동해 푸른 파도에도 완강하고 굳건하다. 이 시대, 강한 바닷바람에도, 성난 파도에도 견딜, 문무왕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를 바래본다.
▶ 디지털 뉴스콘텐츠 이용규칙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