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살 아버지따라 기북 입성
강원도·서울 등 돌며 고생
화물차 운행 30여년째
지구 10바퀴도 더 돌아
최고의 맛집은 끼니 거른날
아내와 도로변서 먹은 라면
강원도·서울 등 돌며 고생
화물차 운행 30여년째
지구 10바퀴도 더 돌아
최고의 맛집은 끼니 거른날
아내와 도로변서 먹은 라면
손상택의 포항이야기<5>
“사랑하는~ 각시야”
70살이 넘은 제가 4살 어린 아내 박연례를 부르는 호칭이다.
노망들었나? 주책이다! 라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 부부는 신혼처럼 이렇게 닭살 돋는 호칭을 아직도 주고받는다.
아마도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지만 너무 어린나이에 엄마가 돌아가셔서 엄마 젖도 물어보지 못한 외로움 탓에 정이 그리워서 그런지 여하튼 마누라 말고도 지인들을 부를때 ‘사랑하는~’ 이라는 수식어를 자주 쓴다.
제가 살아온 인생이야기를 다 적다보면 백과사전 몇 질을 써도 모자랄 거다. 그만큼 고생과 방황 갈등 그리고 땀과 운전, 그리고 일의 연속이었다.
저는 이곳 저곳을 전전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경주 안강 근계리에 태어나 6살 때 아버지를 따라 기북에 들어갔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홀로된 아버지는 작은 가구점을 하다가 망하자 이모부가 있는 이곳 기북장터에서 제재소를 하며 목공일을 시작했다. 책상도 만들고 조립식가구도 만들며 이곳에 정착하는 가 싶었다. 그러다가 강원도 태백에 가 있던 큰 형과 매형이 아버지와 저를 그곳으로 불러 올렸다. 그때가 기북초등 3학년 때였다.
강원도에서 일벌레인 큰 형님은 나무를 베고 아버지는 그 나무로 집을 지어 팔고, 가구를 만들었다.
큰 형님과는 20년이나 차이가 나서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6개월 남짓 일하다가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밤에 서울로 도망을 쳤다. 해병대 선임을 찾아간 곳은 서울 동대문구 면목동의 큰 식품공장. 여기서 꽃길이 열렸다. 빵공장이다 보니 ‘빵순이’라 불리는 여직원들이 많았고 근무조건도 좋았다.
빵돌이로 몇 개월 지내는 동안 이곳에서 전남 나주출신의 현재 아내를 만났다. 25살에 만났지만 우리는 1년 만에 아버지와 형님이 계시던 안동근처 사찰에서 스님의 주례로 조촐한 식을 올리고 45년 결혼생활의 첫 단추를 꿰었다.
결혼을 하자마자 생각지도 못했던 고난이 다가왔다. 해병대 끗발 믿고 예비군 훈련을 안받은 게 문제가 됐다. 자칫 교도소로 갈 처지가 됐다. 방법은 하나 뿐, 당시 치외법권지역으로 여겨졌던 제2고향 강원도 철암으로 도피했다. 이때 아내는 1남1녀중 큰 딸을 임신한 만삭이었는데도 말이다. 당시 강원도 광산촌은 호황이라 고향 기북의 친구들도 많이 불러올렸으나 광산이 사양길로 접어들 때 즈음 우리가족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부산으로 내려왔다.
일단 면허증을 따고 1978년께 영업용 택시 운전부터했다. 택시 3년을 시작으로 10년 정도 통근버스 운전을 했고 이어 1993년부터 5t트럭을 몰기 시작한 것이 지난 2016년까지 23년째 하고 있다. 화물차는 부산항에서 수입화물을 싣고 서울과 수도권을 주로 왕복했는데 몇 년 동안은 아내와 함께 타고 알콩달콩 달렸다. 때로는 끼니때를 놓쳐 도로변에서 컵라면을 먹을 때도 있었지만 아내와 함께라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버스와 화물차 운전대를 잡은지 30여년동안 달린 거리만도 지구 10바퀴를 돌고도 남았다. 3년 전부터 운전대를 놓고 기북에서 취미삼아 닭을 키우고 있다.
돌아보니 인생이 참 파란만장 했다. 배움에 한이 맺혀 한학을 독학했고 쉴때는 먹을 갈아 붓을 들기도 했다. 좋은 글귀가 있으면 적어 주변에 나누기도 한다. 치열한 삶을 살다 볕 따스한 이곳 기북에서 닭, 개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여유로운 한 나절을 보내는 지금이 가장 행복한 날이다.
자료제공=콘텐츠연구소 상상·도서출판 아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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