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함이라는 외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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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함이라는 외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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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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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은의 사적인 LP
빌리 조엘의 ‘52nd Street’를 들으며

43 Bellvue

내가 파리에 도착한 그 밤, 가브리엘은 자신이 만든 향을 선보였다. 가브리엘은 프랑스 파리에, 나는 호주 멜버른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재회한 건 거의 3년 만이었다. 몇 해의 공백을 채울 틈도 없이 가브리엘은 시향지를 코끝에 들이밀었다. 피붙이처럼 어울려 지낸 사이였기에 이런 행동의 의미를 눈치채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간 연구하고 실험한 결과를 어서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가브리엘이 준비한 향은 총 세 가지였고, 각기 다른 이름이 붙어 있었다. 나는 향보다 먼저 이름에 눈길이 갔다. ‘10 Firmin-Gillot’, ‘22 Richaud’, 그리고 ‘43 Bellvue’. 프랑스어가 익숙하지 않은 나는 의미를 물어보려다 마지막 숫자에서 힌트를 얻었다. 그건 당분간 내가 지내게 될 가브리엘의 작업실 주소였다.

어느 날 문득 가브리엘은 운명처럼 향을 창조하는 직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우리는 함께 프랑스 향수 제조의 중심지인 그라스를 여행하기도 했다. 벌써 십 년도 지난 일이었다. 열아홉 살에 향을 쫓아 프랑스로 넘어간 가브리엘은 이제 자신이 지내 온 공간을 브랜드로 명명한 향을 내게 선보이는 중이었다. 나는 어느새 삼십 대 중반, 가브리엘은 어엿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세 가지 향수의 이름은 가브리엘이 지낸 장소 이상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가 발견하고자 한 향기를 향한 시간과 노력이 응축된 에센스, 곧 그 향의 정확한 이름이었다.



52nd Street

빌리 조엘의 여섯 번째 앨범 ‘52nd Street’를 들으며 가브리엘의 향수를 떠올린 까닭은 음악과 향기 모두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가졌기 때문이다. ‘52nd Street’는 곳곳에서 비밥이 흘러나올 것 같은 뉴욕의 재즈 거리를 떠올리게 한다. 푸른색 체크 재킷에 청바지를 입은 빌리는 두 손을 꼭 모아 트럼펫을 쥐고 있다. 거리에 널브러진 쓰레기나 흰 벽에 드리운 시커먼 자국은 신경 쓰이지 않는다. 그는 이제 이 거리를 연주할 참이다. 그의 표정은 부드러우나 시선은 날카롭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벽에 기대어 선 자세나 때가 탄 운동화, 헐렁한 넥타이만 보아도 그가 선보일 음악적 색상을 예상할 수 있다. 빌리 조엘은 하나의 브랜드처럼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고, ‘52nd Street’는 빌리 조엘 그 자체로 전 세계에 각인되었다.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앨범의 진실은 그의 눈에 있다. ‘Piano Man’ 빌리 조엘은 ‘52nd Street’ 위에 서 있다. 그의 표정은 이제 안이 아닌 밖을 향하고 있다.



Honesty

그의 목소리에는 많은 감정이 담겨 있다. 순수하고 해맑은 소년이 있는가 하면 폭발적이고 거친 사내가 반항적으로 외치기도 한다. 무엇보다 매력적인 건 바로 피아노의 강약 조절이다. 단조롭지만 흐트러지지 않는 음정에는 한 번도 날개를 펼쳐보지 못한 날짐승의 비애가 있다. ‘Honesty’를 부르는 빌리 조엘을 그려본다. 이런 노래를 부르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내 삶을 정직하게 이야기하고, 현실을 오래도록 응시하는 직업을 가지고 싶었다. 그건 모두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이름의 이야기였으므로 빌리 조엘이 아닌 누구라도 시도해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마술처럼 창조한 향기 위에 자신만의 거리를 써놓은 가브리엘의 세계에는 정직함이라는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파리에 머무는 동안 가브리엘과 함께 지나온 삶의 의미와 다가올 시간의 불안에 대하여 그리고 행복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했다. 각기 다른 사정으로 해외에 머물게 되었으나, 우리가 바라는 행복의 성취에는 국적이나 시대를 초월한 음악 같은 구석이 있었다. 그건 오직 자신만이 연주할 수 있는 악장을 넘기는 일이었다.

가브리엘과 지내는 동안 유독 즐거웠던 순간은 빨래 바구니를 들고 코인 세탁실로 걸어가는 길이었다. 갓 구운 바게트 냄새가 풍기는 좁은 길을 걷고 있으면 어떤 음이라도 흥얼거리게 된다. 그 시절의 나는 무슨 노래를 부르고 있었을까.

‘Honesty is such a lonely word.’

정직함이란 참 외로운 단어네.

우리는 해가 지는 좁은 길을 나란히 걷고 있었다.

오성은 작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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